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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 09 / 29
종이와 콘크리트에 갇힌 건축 운동
       

종이와 콘크리트에 갇힌 건축 운동

<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Sep. 1, 2017 – Feb. 18, 2018


안창모(경기대학교 교수) | 진행 박성진 편집장 | 자료제공 국립현대미술관

The exhibition visualizes the most active periods from 1987 to 1997 and the social changes during this decade in the form of videos and texts.

눈이 밝은 분들은 보았을 것이다. 전시 제목에서, 우리글로는 ‘건축 운동’이라고 적혀 있는데 영어에서는 ‘운동(movement)’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것은 번역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글과 영어의 표현이 다른 이유에 대해 전시장 어디에도 설명이 없다. 우리말 표현에는 있는 ‘건축 운동’이 영어 표현에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할까? 이 질문은 <종이와 콘크리트> 전시를 관통하는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한다.

전시기획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 ‘건축 운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과 사용하지 않는 것의 차이를. 그렇다면 전시기획자는 우리글 표현에서 강한 메시지를 전하는 핵심어인 ‘건축 운동’을 영어에서 사용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혔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차이를 읽어내는 것을 전시 관람객의 몫으로 남겨놓는 것이 전시가 의도한 바일까? 아니면 비평하는 사람의 몫일까?
전시를 보고 또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전시에 대해서 써야 할지, 전시 주제에 대해 써야 할지. 필자가 이런 고민을 하는 이유는 전시 내용이 전시가 표방했던 바를 충분히 드러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 전시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그러나 전시는 1987년 이후 건축계는 물론 한국사회도 충실히 담아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전시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시였다면 충분할 수도 있다. 그러나 1980년대생 또는 이후에 태어난 세대를 대상으로 한다면, 이 전시는 너무 어렵다. 젊은 관객들과 공감할 수 있는 접점을 찾기가 너무 어렵다.
이른바 건축 운동을 지향했던 이들은 자신들이 디디고 서 있는 현실의 문제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그 운동이 극복하고자 했던 장애물이 충분히 극복되어 오늘을 사는 건축인들이 옛일을 훌훌 털어버리고 과거의 문제를 관조하는 상황이 되었다면 모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산적한 문제가 있다. 선배들을 움직이게 했던 많은 문제들이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는 현실에서, 전시가 오늘의 후배들과 앞선 경험을 공유하는 접점을 만들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Archives of individual architectural groups: key documents, books and posters

전시 주제를 살펴보자. 필자는 기획자에게 우리 건축계가 서구에서 보편화된 건축 운동이 우리에게는 없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또는 동경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운동은 왜 생기나? 그리고 어떻게 움직이나? 그리고 그들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가? 운동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당면한 문제 해결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혼자 해결하기에는 너무 버거워서 함께하는 것이 운동이다. 즉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움직이며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기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인 실천의 과제를 공유하고 있다. 극복의 대상은 당연히 개인이 아닌 사회의 문제를 대상으로 한다. 그렇다면 <종이와 콘크리트>에서 다루고 있는 건축 운동은 어떤 문제를 대상으로 할까?
시작점은 1987년 민주화운동이다. 1987년 6월의 민주화를 향한 범국민적 투쟁으로 한국 사회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표면적이지만 군부의 퇴진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라는 성과를 우리 사회가 쟁취했다. 건축계에서는 청년건축인협회(이하 청건협)라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범국민적 투쟁의 일원으로 건축도 움직인 것이다. 자연스럽게 청건협의 활동은 ‘주거와 도시문제, 건축계의 노동문제’에 주목하고, 철거민의 집단 이주지 설계, 대단위 개발에 대한 대안제시,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를 위한 의료시설 모색 등 건축적 대안을 모색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건축계에서는 처음 펼쳐진 대 사회운동이었다. 300명이 넘는 젊은 건축인들이 모였다. ‘건축가’라는 표현 대신 ‘건축인’이라는 표현 속에는 건축가 중심의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지향성도 뚜렷하게 표방했다. 이전의 건축계는 건축계 이슈에 대해서 건축가협회가 입장을 표명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건축가집단 이외에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언을 하는 건축인 직능그룹은 거의 없었다. 문화예술을 표방하는 장르 중 사회에 무관심한 유일한 전문가 집단이 건축가 그룹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1987년은 건축이 기존의 틀을 벗어나는 계기였고, 그 선봉에 청건협이 있었다. 그러나 청건협의 활동은 1990년대를 맞이하지 못했다. 굳이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그들의 활동은 학부생 중심의 수도권지역건축학도협의회(이하 수건협)와 대학원생 중심의 건축운동연구회(이하 건운연)로 확산되었고, 1988년에는 민족예술인총연합회 산하의 민족건축위원회, 1992년에는 건축가 중심의 4・3그룹으로 이어졌다. 1993년에 문민정부의 등장과 함께 등장한 ‘건축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이하 건미준)’과도 맥이 닿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1990년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교육개혁이 답이라고 생각했던 건축가들의 열의가 경기대학교 건축대학원과 서울건축학교로 이어졌지만 그 결과 역시 참담하다. 한마디로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은 실패했고, 그 흔적은 ‘콘크리트’로 남지 못하고 ‘종이’로만 남아 있다.
이유가 뭘까? 굳이 이유를 외부에서 찾자면, 1998년의 IMF 경제위기다. 한국경제가 총체적인 위기를 맞이하면서 건축 운동 역시 경제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핑계에 가깝다. IMF 경제위기로 한국사회의 모순이 극단적으로 표출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건축계는 이 위기에서 자신들의 명확한 좌표를 찾았어야 했다. 그러나 최소한의 좌표마저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는 이 점에 주목했어야 했다. 그러나 전시는 분석과 평가의 순간에 멈춰 섰다. 전시기획팀은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 명백하게 선을 그었지만, 그렇다고 전시가 준 기회의 포기에 대한 비판을 피해 가기는 어렵다. 이러한 좋은 기획이 또 만들어지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Copy table: architectural magazines 1987 – 1997 and books related to society and culture in the 1990s, 1 copy machine

그들은 왜, 90년대를 넘어서지 못했을까?
한마디로 무임승차(無賃乘車)를 했기 때문이다. 가혹한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이다. 운동은 해결해야 할 현실 문제가 있을 때 시작된다. 그리고 현실 문제의 심각성과 이를 극복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을 때 움직인다. 그렇다면 1987년의 건축계는 어떤 문제를 마주하고 있었을까? 1987년 체제라고 하는 한국사회의 문제를 건축계가 충분히 공유하고 있었을까? 적어도 청건협, 민건협 그리고 수건협과 건운연은 문제의식을 사회와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1990년대의 문턱을 넘자마자 소멸되고 말았다. 바통은 건축가에게 넘어갔지만 건축가들은 사회문제보다는 건축계 내부와 자신들의 문제로 범위를 축소했다.
건축가들이 건축의 공공성과 사회적 역할을 표방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회문제보다는 자신들의 삶이 중요했고, 자신들의 문제가 더 급했다. 그 배경에는 200만 호 주택공급으로 상징되는 건설시장이 있다. 200만 호 주택공급을 구호로 내세운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1990년대 건축계는 호황을 누렸고 21세기 주거문화의 모델을 제시하겠다는 ‘분당 전람회주택단지’가 기획되면서 건축 운동에 동참했던 많은 건축가들이 참여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1927년 스튜트가르트의 바이센호프주거단지를 모델로 한 전람회단지였지만, 목표점이 달랐다. 바이센호프주거단지는 산업혁명으로 피폐해진 노동자의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기획이었고, 건축가들은 경제적이고 빠르게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삶을 담을 수 있는 자신들의 해법을 담은 제안을 내놓았다. 그 결과물은 새 시대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분당 전람회주택단지는 달랐다. 54~195평의 대지에 57~98평 규모로 지어진 단독주택, 30~99평 규모의 빌라는 신문에서 한국의 비버리힐즈라는 평을 받았다.
양적 성장이 가져온 풍요로움 속에서 부닥친 자기 정체성의 문제를 고민했던 건축가들이 4・3그룹이라는 이름으로 모였고, 그들은 부족한 자신을 채우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와의 거리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아니 가까워질 수 없었다.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새로운 건축계의 움직임이 일었다. 건미준이다. 1987년 민주화와 함께 출발했던 청건협을 보는 듯했다. 다양한 건축계 인사들이 참여했지만 건축가가 중심이었다는 점이 청건협과 달랐다. 당연히 문제 제기 방식도 대안도 달랐다. 사회를 향한 많은 외침과 선언을 던지며 내부 쇄신을 꽤한다고 했지만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In this exhibition, ‘papers’ are indicative of the means through which we can illuminate the relational network of the previous generations of architecture, people who are now in their 40s, 50s, and 60s and still active in the field.

1987년 이후 우리 사회는 확실히 변했다. 그렇다면 1987년 이후 우리 건축계도 변했는가? 이제 1987년 이후 10년을 거쳐 온 우리 건축계를 살펴보자. 운동이 있었다면 운동의 결과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87년 청건협이 내세웠던 과제는 얼마나 해결되었을까? 해결된 부분이 있다면 그 해결에 건축계는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을까? 그리고 4・3그룹과 건미준은?
불행하게도 운동의 성과는 거의 없다. 굳이 운동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면, 경기대 건축대학원과 서울건축학교의 건축교육 개혁운동이 미국을 모델로 한 5년제 건축학부와 인증제도의 도입으로 이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면 5년제 건축학부가 도입되어 건축가들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졌으니, 건축대학원과 비제도권 교육기관은 역할을 다한 것일까? 한국건축교육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두 체제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건축학부 5년제는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위태로워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았는가? 1987년 체제가 건축계에 준 기회를 우리는 살리지 못했다. 모든 불씨가 꺼졌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현실이다. 군사정권이 건축의 운동성을 촉발했지만, 운동단체를 출발시킨 사회적 조건과 건축계의 내부 동인과 절박함이 일치하지 않았다. 바로 이 점으로 인해 민주화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문민정부가 출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거품과 함께 건축운동단체는 스스로를 무장해제하고 말았다. 무임승차했기에 도중하차(途中下車)에 대한 부담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실천과 실험은 계속되어져야 한다는 말이 미완성의 운동을 미화할 수는 없다. 실천과 실험은 계속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실천과 실험은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타나는 해결사와 같기 때문이다. 운동은 존재의 위기감을 절박하게 공유하는 사람들로 시작한다. 우리에게 그런 위기가 있었는가?
‘왜? 한국사회에는 존경받는 건축가가 없을까?’라는 자문자답(自問自答)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가 절실하게 건축가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우리 사회와 함께했던 건축가는 없었다. 사회와 함께하는 주제의 건축전시가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With videos and image archives, gallery 4 inquires into the passion and ideological foundation that propelled these groups to 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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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모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컬럼비아대와 일본 도쿄대에서 객원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경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사회사와 기술사로서의 근대건축 역사를 연구하며 역사문화환경 보존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도코모모설립추진위원장, 한국건축역사학회 부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서울시도시계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현대건축50년』, 『덕수궁』, 『평양건축가이드북(독어/영어, 공저)』, 『서울건축가이드북(공저)』이 있고, 2014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에서 서울과 평양의 도시와 건축을 비교 전시한 한국관의 공동큐레이터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tag.  전시 , 미술관 , 건축운동 , 4・3그룹 , 건축전시 , 국립현대미술관
       
월간 SPACE 201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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