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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2월] 투상도적 매체를 통한 사고의 틀짜기: 1980년대 한국 건축계에 등장한 새로운 건축 도법에 관한 비평

김호영, 소닛 바프나


1980년대에 들어서 한국 건축계에 새로운 유형의 프레젠테이션용 건축 드로잉이 등장했다. 이때의 건축 드로잉은 정교하고 복잡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때때로 건축 프로젝트를 재현하는 것보다 드로잉 자체가 목적이 되는 듯하다. 사실 유럽과 북미와 일본의 건축학계에서는 이미 1970년대부터 이러한 건축 드로잉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건축 실무와 이론 영역에서는 건축 드로잉의 개념과 사용 방식에서 급격한 도전과 변화를 시도했고, 다양한 전시와 출판을 통해서 이를 확산했다. 한국 건축가들은 이렇게 시작된 건축적 유행을 따르면서, 건축 드로잉의 본질에 대한 관심을 진지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심과 참여는 당시 한국에서 발행된 「SPACE(공간)」,「건축문화」, 「건축과 환경」과 같은 주요 건축 전문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건축 드로잉과 그에 대한 여러 필자들의 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몇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우선, 건축에서 재현의 역할은 무엇인가? 둘째, 건축 드로잉의 도법과 건축 드로잉이 표현할 수 있는 생각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마지막으로, 이러한 도법이 발달하게 된 문화적 문맥이 바뀔 때, 그 생각이 어떻게 변하는가? 물론 이 질문들을 한정된 지면에서 충분히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얼개와 토대를 마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첫 단추로 ‘건축 드로잉이 어떻게 내용을 전달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건축 드로잉은 재현적 도구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재현할 실제 건축물을 위한 대용물이다. 그렇지만 건축가들은 직관적으로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 다른 방식이라 함은 형태와 기하학에 대해 논의하는 것과 더불어 다른 특성 혹은 좀 더 광범위한 의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직관적 의미를 명확하게 살펴보는 것은 새로운 유형의 프레젠테이션 드로잉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이에 앞서, 프레젠테이션 드로잉의 기하학적 속성과 관습적 선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프레젠테이션 드로잉은 3차원 형태를 2차원 표면 위로 옮기는 기하하적이고 체계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투영도를 기반으로 한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3차원적 대상이 지닌 길이와 깊이와 각도와 같은 기하학적 속성들이 일부 왜곡되기도 하지만, 그 길이의 비율은 그대로 보존된다. 그리고 우리의 시각 체계는 특별한 훈련을 거치지 않아도 2차원 드로잉에서 3차원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설령 투영된 형태가 일부 왜곡되더라도, 상대적 크기와 형상 그리고 깊이를 판단하여, 3차원 대상을 지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여전히 추론적이고 경험적이다. 우리 시각 체계가 손쉽게 실수를 범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실수로 인해 대단히 잘못된 결론이 이르는 일은 거의 없다.

기하학적 법칙을 바탕으로 한 사영사상(projective mapping)은 투상 방식, 즉 아핀 공간(affine space)에서 직선이 그대로 평행하게 유지되는지, 아니면 수렴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드러난다. 예를 들면 직교 투상 과 경사 투상 방식의 평행 투상과 투시 투상이 있다. 비록 투상 결과는 질적으로 다를 수 있지만, 각각의 이미지 혹은 드로잉은 투상 대상의 3차원적 형태를 둘 다 잘 전달한다. 건축의 경우에는 경험의 법칙을 바탕으로 건축가가 상기 투영 방식들을 적극 선택하여 활용한다. 예를 들어 건축가는 투상된 대상을 투시 투상으로 다소 명확하게 재현하거나, 직교 투상의 한 형태인 등각 등축 투상으로 다소 불명확하게 재현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 건축가는 선의 종류와 두께와 음영과 톤과 같은 부차적인 요소들을 활용하여 건축 드로잉을 정교하게 다듬는다. 따라서 건축가는 투상 방식과 부차적 요소를 선택하거나 조작할 수 있고, 그것에 의해서 투상 대상의 정보나 3차원성을 자신의 의도대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투상 방식과 부차적인 요소들의 사용은 왜 중요하고, 어떤 이점이 있는 것인가? 답변을 위해서, 건축 드로잉이 어떤 종류의 정보를 전달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건축 드로잉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으레 다양한​ 선들과 기호들을 읽고,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이해한다. 건축 드로잉은 일종의 상징 시스템이다. 이 상징 시스템을 이해하는 이론적 틀은 이미 넬슨 굿맨이 제시하고 있다. 그의 상징 이론 가운데, 상징 현상을 분석하여 기술과 묘사와 예시와 표현이라는 네 가지 다른 양상으로 설명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차이는 상징과 지시 대상, 예를 들어 건축 드로잉과 대상 건축물 사이의 매핑이 수립되는 방식에 달려 있다. 따라서 건축 드로잉의 다양한 표시들을 특정 구문상에 놓인 구체적인 상징 혹은 기호로 간주하여, 건축물을 위한 묘사적 요소나 드로잉 그 자체가 예시하거나 표현하는 특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드로잉의 묘사적 요소들과 예시된 특성들이 그 드로잉의 구문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설명한 이론적 틀을 바탕으로 한국적 상황을 살펴본다. 새로운 유형의 건축 드로잉의 출현과 함께, 건축 드로잉에 관한 다양한 전시와 출판이 이어졌고,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건축 드로잉이 건축가의 주요한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으며, 전반적으로 지적 태도를 설명하는 수단으로 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분명히 건축 드로잉은 단지 대상 건축물을 위한 기계적인 묘사 수단이 아닌 건축적 사고를 기록하고 당시의 이론적 관심사를 다루는 주요한 매체였다. 그리고 일부 진보적인 건축가들은 서양 건축 드로잉의 독특한 사용 방식을 받아들이면서, 한국 건축의 정체성에 대한 이슈들에 대한 관심을 건축 드로잉에 표명해나갔다. 따라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한국 건축계에 일어난 지적 전개를 조망하면서, 건축 드로잉이 이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80년대의 건축계는 한국적 근대건축이 무엇인지 질문했다. 다시 말해서 전통의 무비판적 답습도 근대적 형태의 단순한 모방도 아닌, 진정한 근대적 표현이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이자, 지난 몇 십 년간의 한국 건축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제기된 반성적 태도였다. 이러한 질문이 전반적 건축 이슈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이전 세대와는 구분되는 젊은 건축가들과 4・3그룹의 출현은 예고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진정한 한국적 특성을 표현하는 형태 언어와 양식을 찾고자 했고, 그들은 건축적 태도를 설명할 수 있는 적합한 매체로써 새로운 유형의 건축 드로잉을 다루었다. 이러한 드로잉을 통해, 건축가들은 국제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선진 건축 사상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특정 형태와 추상적 생각을 진부하게 연관하지 않으면서 정통성과 한국성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다룰 수 있었다. 1980년부터 1990년 초까지의 건축 전문지에 게재된 건축 드로잉들 가운데, 승효상의 성북동 주택 프로젝트와 조성룡의 서울아시안게임 선수촌 프로젝트의 90도 엑소노메트릭 드로잉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은 90도 엑소노메트릭에서 각각 ‘낯설게 하기’와 ‘공간의 켜’라는 독특한 전략을 사용하여 관찰자들에게 비판적 자각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90도 엑소노메트릭이 그러한 전략을 강조하는 역할을 맡아서, 새로운 디자인의 새로운 특성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드로잉과 이론의 상호작용에서 나타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드로잉의 실천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론 사이의 순서다. 서양에서는 실험적인 건축가들이 기존의 사고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새로운 건축 드로잉을 만들었고, 이러한 드로잉을 뒷받침하는 이론들이 뒤이어 발전했다. 한국 건축에서는 이들을 발전된 형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 새로운 드로잉의 사용을 복잡한 유행의 전용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 건축가들은 그것들을 자기 반성과 자신의 독창성을 위한 매체로 여기면서, 글을 대신하여 이론을 발전시키는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한다. 이렇게 발전된 이론 역시 일련의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실천의 관습과 그것의 잠재적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글을 쓰면서 가용한 많은 자료들 가운데 일부에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를 통해, 당시 필자들은 건축 드로잉들이 보여주는 복잡다단함과 사상적 깊이를 설명하려 했음을 알 수 있었다. 향후 이러한 건축 드로잉에 대한 심도 있고 포괄적인 연구가 더 이루어지길 바란다.​

 

논문 원문은 ​첨부파일을 다운로드하여 보실 수 있습니다. 

 


김호영, 소닛 바프나
김호영은 2015년 12월에 조지아 공과대학교에서 건축역사비평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건축 이론과 건축 미디어의 재현적 특성과 분석적 시각 인지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다.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시간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세기 건축의 프로그램과 선언』을 번역하고 있다.

소닛 바프나는 조지아 공과대학교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연구는 건축물의 시각적・공간적 형태학을 기반으로 하며, 최근에는 관심을 인간 심리학과 미학 분야로 확장하여 다양한 연구와 저술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 『건축물의 실현에서 상상적 추론』이라는 책을 저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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