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5년 12월호 (통권 697호)

〈산과 친구되기〉 전시 전경.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 Photo by Sangtae Kim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산과 친구되기’(2025), ‘물고기와 맞추는 달’(2025), ‘번개치는 정원’(2025) 설치 전경.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 Photo by Sangtae Kim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오는 11월 28일부터 바르셀로나 출신 작가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의 개인전 〈산과 친구되기〉를 개최할 예정이다. 한국에서는 처음 열리는 이번 개인전은 드로잉, 사진, 비디오, 조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며 자연과 인간 문화의 복합적인 관계를 섬세하고 시적인 시각언어로 제시한다.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는 자연을 대상화하거나 주변부 환경으로 인식하지 않고 세계 속 존재의 일부로 파악한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일생에서 마주한 생물학적, 인류학적 층위의 경험과 지적 기반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동식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2000년대 중반 이후 브라질에 장기 체류하며 리우데자네이루와 아마존의 자연환경과 지역의 토속 사상에 깊이 공명했다. 특히 마타 아틀란티카 지역과 아마존 우림의 멸종 위기 속에서도 유지되는 생태적 복잡성과 생물 다양성은 그의 세계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의 작업은 생태계 내 존재들의 상호 얽힘과 의존성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며, 자연과 인간, 생물과 비생물의 위계를 해체한다. 이러한 관점과 태도는 근대주의의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등장한 사상과 관련되는데, 특히 메를로 퐁티가 살(chair) 개념을 통해 제시한 감각과 세계의 얽힘(entrelacs)과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행위자(actant)로서 상호작용한다고 본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작가의 핵심적인 이론적 틀로 작용한다. 작가는 이러한 개념이 숲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번 전시는 관객의 감각적 몰입을 유도하는 공간구성으로 기획됐다. 전시장에 설치된 사선 파티션은 서로 어긋난 각도로 배치되어 공간 파악을 지연시킨다. 관객은 방향성을 상실하고, 공간 전체는 질서와 혼돈 사이를 유영하는 하나의 미로처럼 구성된다. 혼돈 속에서 만나는 주요 작업 중 하나는 전시 제목과 동명인 ‘산과 친구되기’(2025)이다. 작가의 대표 연작 중 하나로, 금속 재질의 커튼은 크리스카데코 사의 기성 부품을 이용해 제작되었다. 커튼은 전시장 통로에 겹겹이 배치되어 통행을 허용하는 동시에 차단하며, 통과 여부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을 조성한다. 관객이 커튼을 밀고 지나가는 순간, 느슨하게 매달린 금속 가닥들은 물리적 장벽에서 유동하는 경계로 전환되고, 커튼은 평면적 오브제가 아닌 감각적 접촉을 통해 구성되는 환경으로 바뀐다. 금속성 마찰음과 미세한 촉감은 전시장의 음향과 리듬에 개입하며, 관객은 시각적 감상이 아닌 신체적 참여를 통해 공간에 진입하고 있다고 자각하게 된다. 커튼 설치는 장소특정적인 작업으로, 작가가 한국에서 관찰한 형상을 바탕으로 디자인되었다. 명확히 무엇을 본뜬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산과 친구되기’라는 전시 제목이 관객에게 자연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암시를 준다. 커튼의 색채는 금빛 햇살이나 노을을 연상시키며, 자연과의 신체 접촉을 환기하는 시각적 장치로 기능한다.
전시장 곳곳에 배치된 ‘번개치는 돌’(2025)은 가느다란 필라멘트에서 발생하는 빛과 그것이 번개 치며 조우하는, 풍화의 흔적이 남은 돌의 모습이다. 각기 다른 형상은 ‘산’, ‘코끼리’, ‘사자’, ‘용’ 등의 별칭으로 불리지만 이는 특정한 의미를 지시하는 기호라기보다는, 생물과 무생물, 자연현상과 인공물 등 우주에 살아가는 다양한 존재들을 아우르는 애니미즘적 사유를 암시하는 조형으로 제시된다. 작가는 메아리 현상과 바로크음악의 리토르넬로 구조에 착안해, 바위 형상들이 전시 공간 내에 반복해서 등장하면서도 변형·변주돼 관객의 감각을 자극하도록 구성했다.
전시 후반부에는 외부 설치 작업 ‘번개치는 정원’(2025)이 등장한다. 중정에 설치된 실제 소나무 정원은 두 그루의 한국 소나무가 검은 화산석으로 덮인 구릉 위에 배치되어 있으며, 그 위로 번개 장치가 작동한다. 주변의 인공적 재료와 대비되는 비현실적 풍경은 전시 전반을 관통하는 감각적 구성의 정점을 이루며,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 도시의 공간과 우주적 공간이 결합된 자연의 무한함을 드러낸다. 유리창 너머 상영되는 비디오 작업 ‘물고기와 입맞추는 달’(2025)은 경주 월지에서 촬영된 영상으로, 물 위로 비친 달과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가 만나는 장면을 시적으로 담아냈다. 서로 닿을 수 없는 두 존재가 접속하는 장면은 ‘번개치는 정원’과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우주를 구성하며 전시 경험의 감각적 얽힘을 마무리한다.
이번 전시는 자연을 재현하지 않고도 예술과 자연이 감각적ㆍ공간적 접촉을 매개로 관계맺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관람객이 자연을 새롭게 인식하고 관계를 재설정해보는 자리가 될 것이다. 전시는 2026년 3월 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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