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5년 12월호 (통권 697호)

이강소, ‘바람이 분다-250109’,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130×97cm, 2025. Image courtesy of Daegu Art Museum

왼쪽부터 ‘무제-75031’(1975, 2025 재제작), ‘페인팅 78-1’(1977) ©Kim Hyerin
지난 9월 9일 대구미술관에서 이강소(1943~)의 대규모 회고전 <曲水之遊 곡수지유: 실험은 계속된다>가 막을 열었다. 이강소는 신체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에꼴드서울에 참여하는 등 현대미술사의 주요한 장면을 전개해나간 작가이다. 이번 전시는 회화, 조각, 판화, 드로잉, 아카이브 등 130여 점의 작품을 소개하며, 반세기에 걸친 그의 예술 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전시 제목 ‘곡수지유’는 흐르는 물길 위에 술잔을 띄우고, 잔이 흘러가기 전에 시를 짓던 동아시아의 전통적 풍류에서 비롯된 말로, 자연의 질서 속에서 흐르듯 사유하고 예술을 나누는 행위는 이강소가 평생 추구해온 태도이다. 그는 특정 사물이나 서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닮은 자유로운 붓질과 흙을 던져 기운을 담아낸 조각 등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자신의 예술을 구현한다.
전시는 이강소의 최근 작품으로 시작된다. 그는 ‘청명(淸明)’ 연작(2016~)을 통해 혼탁함을 걷어낸 맑고 투명한 세계를 화면에 담아낸다. 또 ‘바람이 분다’ 연작(2022~)에서는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를 통해 자신이 포착한 자연의 에너지와 생동감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오랫동안 무채색을 고수해왔던 이강소는 초록색, 파란색 등 다양한 색을 과감히 도입하며, “색이 나를 유혹했다”고 고백한다.
이후 전시는 50년 전 실험미술의 현장으로 관람객들을 안내한다. 어둡게 조성된 공간으로 들어서면, 닭의 움직임이 남긴 발자국과 깃털, 흔적들을 그대로 작품으로 선언한 ‘무제-75031’(1975, 2025 재제작)와 전면에 투명한 유리를 놓고, 그 위에 작가가 붓질을 하는 모습을 담아낸 비디오 작품 ‘페인팅 78-1’(1977)이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컬러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보급되기 이전 시대에 낡은 캠코더로 촬영해 만든 ‘페인팅 78-1’은 회화를 완성된 결과가 아닌 그려지는 과정으로 인식하도록 의도한 작업으로, 단순한 시도를 넘어 새로운 매체의 시대를 예견한다.
이어진 전시에서는 198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된 이강소의 회화 작품과 조각들을 만나볼 수 있다. 1980년대 초반 추상적이고 즉흥적인 붓질로 대표되던 그의 작업은 1990년대에 들어서며 오리, 배, 집 등 단순한 형상들이 기호화되어 자리하기 시작한다. 이런 기호들은 자연의 거대한 흐름 속에 배치되어 세계의 스케일을 환기시키며, 자연 고유의 기세를 더욱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이후로도 오리, 배, 집의 모티브는 수십 년간 꾸준히 반복되며 작가의 주요한 시각적 언어로 자리 잡았다. 그런가 하면 2009년 ‘허(虛)’ 연작을 거치며 이강소는 한층 더 절제된 화면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이 시기 그는 자연의 기운을 ‘채움’이 아닌 ‘비움’을 통해 드러내며, 여백 속에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있음’의 가능성을 담아낸다. 또한 전시에서는 그가 1980년대부터 선보여온 ‘던지는 조각’인 ‘생성’ 연작도 만나볼 수 있다. 흙을 던지는 행위 자체를 통해 자연의 질료와 기세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아낸 이 작업은, 이강소가 예술 전반에서 일관되게 추구해온 자연의 흐름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그 기운을 표현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전시는 회화와 조각, 그리고 다양한 실험미술 전반에 걸친 그의 끊임없는 탐구 정신을 드러낸다. 특히 마지막 공간에서는 1970년대 그가 주도한 실험미술 운동과 대구현대미술제를 중심으로 구성된 아카이브가 마련되어, 새로운 미술의 출발점을 열었던 당시의 역동적 장면을 다시금 펼쳐볼 수 있다. 전시는 2026년 2월 22일까지 이어진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 VMSPAC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