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6년 6월호 (통권 703호)

서성협, ‘소리기념비’(2026) 설치 전경 ©Kim Hyerin

임수식, 책가도 시리즈 설치 전경 ©Kim Hyerin
지난 3월 26일, 디지털 환경에서 빠르게 생성ㆍ소비되는 기억을 인간의 감각과 경험의 차원에서 재조명하는 전시 〈기억의 실루엣: 형태, 이미지, 관점〉이 세화미술관에서 막을 열었다. 전시에선 서로 다른 매체를 활용하는 작가 서성협, 임수식, 김보민이 참여해 설치, 사진 콜라주, 회화 등의 작업을 통해 기억이 형성되는 감각적 구조를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전시장 입구는 책장으로 가려져 있다. 관람객들이 기억을 더듬듯, 책장을 밀어 전시 공간에 진입하면, 가장 먼저 기억의 형태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예술가 서성협의 설치 작품들이 보인다. 디자인스튜디오를 운영하기도 했던 작가는 구조물과 악기 부품, 사운드 장치 등을 결합해 소리와 형태가 만나는 조형 구조를 탐구한 작품들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그의 작품들은 형태적으로는 테트라포드나 현악기, 혹은 우리에게 익숙한 가구들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그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테트라포드는 육지와 바다의 경계, 혹은 국경과 같은 다양한 경계를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새로운 것과의 연결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와 동시에 작가는 보이지 않는 감각인 소리와 진동을 매개로 삼아 물질과 비물질 사이에서 형성되는 감응의 경험을 조형적으로 드러낸다. 그중 나무와 현악기 부품 등으로 구현된 ‘소리 기념비’(2026)는 기념비의 권위와 무게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자문하게 하는 작품으로,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을 물질적 구조와 감각적 울림 사이에서 사유하도록 이끈다.
그런가 하면 사진을 기록과 조형적 장치로 활용하는 작가 임수식은 이미지를 통해 장소의 감각이자 시간의 층위인 기억을 드러낸다. 그는 기억이라는 복잡한 대상을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사진을 콜라주하고, 프린팅 된 사진을 바느질하고, 병풍으로 설치하는 등 다양한 방식을 활용한다. 그중 조선시대 전통 회화 형식인 책가도를 동시대 사진의 언어로 재해석한 책가도 시리즈는 실제 서재와 책장을 촬영한 이미지를 해체하고, 재구성해 하나의 초상적 풍경을 만들어낸 작업이다. 이 작업은 책과 사물의 배열을 통해 지식과 기억이 축적되는 방식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전통 병풍의 방식을 차용한 작업인 ‘m9600’(2026) 또한 눈에 띈다. 이 작업은 서울역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촬영하고, 편집해 인파의 능선을 통해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한국의 주식 그래프와 미국의 주식 그래프의 형상을 비교하며 보여준다. 이를 통해 개인의 기억뿐만 아니라 집단의 기억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지 탐구한다.
작가 김보민은 전통 산수화 기법을 바탕으로 기억의 실루엣을 보여준다. 작가는 경희궁과 새문안 일대, 잠실과 한강 등 서울의 장소들을 모티프로, 산수화의 맥락 안에서 과거와 현재 시간을 중첩시키며 현실과 상상이 교차하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특히 옛 설화나 개인의 마음, 기억, 감정이 포함된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이 작가의 특징이다. 이는 개화동 일대에 얽힌 설화와 함께 과거 개화동의 산수 풍경과 비행기, 대교, 옛 구옥들과 아파트가 교차된 풍경을 함께 담아낸 ‘개화’(2015)에서 뚜렷하게 드러낸다. 작가는 실제 장소를 답사하고, 관찰하고, 오래된 자료들을 통해 사건들을 연결하는 과정 속에서, 기억이 기록되는 동시에 새롭게 구성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작업은 ‘풍경의 실루엣’을 형성하며, 새롭게 생성된 기억들을 회화적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기억이 형성되고 기록되며 다시 재탄생하는 과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이번 전시는 6월 28일까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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