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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혁명가를 꿈꾸는: 건축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윤한진
사진
신경섭
자료제공
푸하하하프렌즈
진행
방유경 기자
background

「SPACE(공간)」 2023년 7월호(통권 668호​)​


한양규의 후암동의 추억 스케치


[PROLOGUE] 건축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2004년 그러니까 홍대 앞 커피빈이 당대 힙스터들의 성지이던 시절. 건축학도임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친구들은 곧잘 지그프리트 기디온의 『공간 시간 건축』이나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 같이 한 장 넘기기도 어려운 철학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곤 했다. 누군가 내가 이렇게나 어려운 책을 읽고 있음을 알아봐주길 바라며 커피빈 테라스에 앉아 한겨울 칼바람을 직통으로 맞아가며 맛도 모르는 에스프레소를 홀짝거리고 있는 것이다. 일부 극성 건축학도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사람 많은 곳에서 큰 목소리로 논쟁 같은 것을 벌이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었는데 이도 분명 그것이 건축학도의 진정한 멋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분하지만 나도 그런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르 코르뷔지에가 말했지! 건축은 삶을 위한 기계여야 한다고!”

“틀렸어!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말한  레스  이즈  모어(Less is more)를  생각해 보라구! 요즘의 건축은 마치 그저 잘난 기계이고 싶어하는 것만 같아!” 

“훗, 둘 다 틀렸어. 들뢰즈가 말했다시피 유목적 사유는 보편적 사유 주체를 요청하는 대신 이와 반대로 독자적인 인종을 요청하지.”

“……”

 

스물한두 살들의 가방끈 짧은 논쟁은 대체로 ‘건축은 무엇인가?’로 시작되어 앞도 뒤도 없는 온갖 인용문 갖다 대기 대결로 추잡스러워지다가 누군가의 입에서 들뢰즈가 나오면 자연스레 논쟁은 종결되었다. 그 누구도 감히 들뢰즈를 반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괜히 반박했다가 짧은 지식을 들키고 싶어 하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한 문장이라도 더 읽어봤냐’의 얕은 싸움. 다시 한 번 고백하자면 이 포켓몬 카드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유치한 싸움들이 나의 20대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때를 떠올리면 죽고 싶을 때가 가끔 있을 정도로 괴로운 개인사이니 농담으로라도 들뢰즈 얘기는 꺼내지 말아줬으면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요란한 스타킹을 즐겨 입어 별명이 스타킹이었던 미대 친구로부터 어떤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의 어떤 작가가 쓴 책인데 번역이 되지 않아 읽어볼 수가 없으며 이렇게 저렇게 책의 줄거리만 떠도는 그런 책인데 소설가와 음악가가 술을 마시며 음악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지 서로 논쟁하다 홧김에 쓴 소설이라는 것이다. 왠지 그 이야기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음악이 세상을 구한다는 이야기도 그렇고 일본의 어느 선술집의 술주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배경도 낭만적이었다. 에릭 클랩튼이 어릴 적 통기타만이 세상과 맞서 싸우는 유일한 무기임을 깨달았다는 일화를 떠올리며 정의의 사도가 세상을 구한 뒤 낡은 통기타로 블루스를 연주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어쩌면 정말로 음악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두 틀렸어. 건축? 얘들아 이제 조금 지겹다. 안타깝지만 음악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어. 그러니 나랑 밴드를 하지 않으련?” 

 

처음부터 끝까지 허세로 마무리 된 나의 20대. 그렇게 건축은 그저 나의 만족을 위한 도구가 되었고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더 이상 침 튀기며 논쟁하는 낯부끄러운 행동은 멈출 수 있게 되었다.

 

정의의 사도

그런데 양규가 모든 걸 망쳤다. 스스로 정의의 사도라고 일컬으며 건축으로 세상을 구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오랫동안 양규의 건축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도 자신의 건축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긴 자신의 건축을 알고 있는 건축가라는 것은 애초에 목적이 분명한 얕은 수를 쓰는 사람일 수밖에 없고 그런 사람은 건축가일 수가 없으니 양규가 자신의 건축을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인 것 같다. 헉. ‘그동안 왜 너는 너를 모르냐’고 지랄했던 지난 일들에 대해 양규에게 사과해야겠다. 미안. 쓰면서 알게 됐어.

돌아와서, 양규가 모든 걸 망친 건 사실이다. 나에게 건축은 논쟁의 대상도 싸움의 대상도 아니었고 평생 같이 사는 친구 정도의 느낌이었는데 (가끔 쟁취용 도구로 쓴 적은 있다. 이 부분도 사과한다.) 양규에게 건축은 ‘세상을 떠받치는 구조’였음을 내가 어느 순간 퍼뜩 깨달아버린 것이다. 취향도 없고 재미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직선으로만 채워져 있는 양규의 스케치를 보며 ‘뭔데 이게 멋있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혹시나 양규에게 건축은 나랑은 조금 다른가 하여 급하게 진행한 인터뷰에서 나의 생각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한 것이다. 다음은 양규와 진행한 인터뷰 전문이다.

 

한진: 양규야, 너는 왜 맨날 울어?

양규: 나는 지금도 그냥 울 수 있어.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슬퍼서가 아니여. 그냥 나는 다 감동이여.

한진: 와! 쩐다! 그러면 네가 눈물을 참지 못할 때는 언제니? 

양규: 가난, 전쟁, 불륜, 사기.

한진: 그러니까 인류애구나. 

양규: 그게 뭐여. 구성애 동생이여?

한진: 아니야 됐어. 너는 건축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니? 

양규: 해 봐야지 않겄어?

한진: 헐!! 미친!!!!!!

 

그렇다. 인류를 구원하지 않는 건축은 양규의 세계에서는 한낱 건물일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양규의 건축에는 사람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고작 분위기 따위를 따지고 드는 것은 양규에게 관심 밖의 일이다. 건축은 가난과 전쟁, 사기 그리고 불륜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해야 할 구조여야 하기에 반듯해야 하고 정직해야 하는 것이다. 감정이 배제되어야만 올바르게 서 있을 수 있는 건축. 그것이 양규의 건축이고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인 것이다. 물론 아직도 그는 자신의 건축이 왜 그러한지 전혀 눈치 못 채고 있는 듯하다. 양규의 건축이 꼭 냉장고나 피라미드 같다고 친구들이 놀려대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스스로 모르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지구방위대 후뢰시맨’이나 ‘파워레인저’ 같은 정의의 사도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은 왜 멍청한 인간들을 대신해 마구마구 맞아가며 지구를 지켜야만 하는지 스스로 묻지 않는다. 그저 악당이 나타나면 싸울 뿐인 반사작용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의 사도는 절대 악을 이길 수가 없다. 그들은 그저 악당보다 싸움을 좀 더 잘할 뿐이다! 이 땅에 악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양규의 건축이 성공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승리할 수 없어 매번 절망하고 처절해하고 눈물을 흘린다. 애초에 나는 건축의 즐거움은 승리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믿고 있기에 이런 양규를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세상과 맞서 싸우는 양규가 나는 멋있다. 우리가 이 귀한 기회를 통해 양규의 건축을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은 나나 승재의 다소 잡다한 생각을 걷어내고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처절함이 드러나는 정의의 건축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서문을 쓰며, 그가 자본과 손을 잡고 악랄한 건축을 하기 시작하면 푸하하하프렌즈의 균형은 깨질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양규 자신이 왜 정의의 사도 짓을 계속해야 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도록 조심해줄 것을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공식적으로 요청하는 바다. 양규가 건축으로 세상을 구할 때까지!​

 

 

월간 「SPACE(공간)」 668호(2023년 7월호) 지면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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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하하프렌즈
푸하하하프렌즈는 윤한진, 한승재, 한양규 세 명의 대표 건축사와 김민식, 김학성, 온진성, 윤나라, 이호림, 이호정, 전중섭, 조영호, 최영광, 홍현석 열 명의 친구들이 함께 모여 일하는 건축사사무소다.
윤한진
윤한진은 홍익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디자인캠프문박 디엠피에서 실무를 했다. 푸하하하프렌즈의 지금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