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4년 2월호 (통권 675호)
거대한 삼각형의 매스가 대지 위에 떠 있는 조형. 제주 기후에 맞춰 유지관리에 용이한 천연슬레이트로 넓은 박공지붕면을 마감했다.(트믐, 2022)
삼각형에 만곡된 선이 중첩된 지붕(수리코, 2020)
드러냄의 해법
건축은 결국 드러내는 일이다. 건축가는 이를 필연적으로 알고 있다. 표면적이든 내재적이든, 물리적이든 관념적이든, 건축은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기 마련이다. 존재를 희미하게 하는 것도 결국 ‘희미하게 드러내는’ 방식의 하나다. 드러나지 않는 건축은 작동하지 않는 기계와 같다. 건축은 드러냄을 통해 사회와 관계 맺으며, 이 관계 속에서 건축의 의미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인지되지 않는 건축은 죽은 건축이나 다름없다. 우리에게 드러냄이란 건축의 방향을 설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사회와 건축을 어떻게 연결할지 질문하는 일이다. 그 해법은 다양하며 여러 상호작용 속에서 관계를 맺는다. 비일상과 일상의 경계에 건축을 놓는 것, 물질적인 표현 질서를 만드는 것, 단순함과 복잡함 사이에서 조율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드러냄의 해법이다.
곶자왈 인근에 화산암 돌덩어리가 평평한 판 위에 얹힌 듯한 조형을 상상했다.(청수곶, 2023)
형태에서 발현되는 공간
건축의 실체를 결정짓는 형태는 일반적으로 건축가의 사고나 개념, 조건 등에서 비롯된 합리적 결과물로 인식된다. 그러나 형태는 역으로 건축적 사고를 촉발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곤충의 몸이 머리, 가슴, 배로 구분되듯 건축의 형태는 지붕, 벽, 기둥, 바닥, 기초 등으로 구성된다. 곤충의 머리와 가슴을 합친 것을 돌연변이라 부른다면, 건축에서 지붕과 벽을 하나로 합친 것은 돌연변이가 아닌 변종에 가깝다. 관습적 사고에서 탈피한 이러한 변종은 사용자들에게 보다 다양하고 새로운 공간 경험을 제공한다. 네모반듯한 형태에서 벗어난 건물, 내외부의 경계가 흐릿한 곳에서 사람들은 공간의 강력한 힘을 경험한다. 이때 사람들이 느끼는 내부 공간의 자유로움은 건축 공간의 본질적 감각을 한층 증폭시킨다. 형태는 목적을 분명하게 투영하고 공간을 이끈다. 삼각형의 공간(트믐, 2022), 오름이 들어 앉은 듯한 공간(제주 삼달오름, 2018), 돌덩어리 같은 공간(청수곶, 2023)의 사례처럼, 외부의 강력한 조형성이 내부 공간으로 이어질 때 건축의 감각은 다채롭게 변주된다. 물론 형태의 존재감이나 특별함만으로 좋은 건축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형태를 앞세운다고 해서 건축의 본질이 흐려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형태에서 발현되는 공간을 탐구하는 우리의 작업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수한 사고를 유발하는 현상학적 건축에 한발 다가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막힌 전면과 달리 풍경을 바라보도록 열린 후면.(트믐)
욕실(1층)을 거쳐 방(2층)으로 진입하는 구조의 스테이 공간(더 스테어, 2019)
구운 대나무는 내식성이 좋고 쉽게 재단이 가능해 자유로운 곡면이나 공극이 필요한 입면에 사용하기 좋다.(곡성 월든하우스, 2020)
일관된 독특함
독특함은 보통의 규칙이나 원리에서 벗어난 특별함을 뜻한다. 건축에서 독특함은 낯설게 보게 하거나 경계를 느슨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창의적 시도는 프로젝트를 거듭할수록 되풀이되고 발전하면서 일관성을 띠게 된다. 공간을 중심에 둔 우리의 작업은 나름대로 일관된 독특함을 유지하며 발전해왔다. 이러한 태도는 맥락, 기능, 구조, 재료에 대한 접근에서도 드러난다. 2차원이나 3차원으로 꺾인 곡선과 곡면 등 보다 자유로운 공간과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반복하면서, 기후나 환경에 적합한 재료(구운 대나무, 징크, 천연 슬레이트, 벽돌 등)를 선정하고, 이를 재단하고 연결하는 구법에 대한 노하우와 디테일을 축적했다. 일관된 독특함은 데이터들이 모이고 쌓였을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한 건축의 어휘는 상황에 맞게 변주되면서 프로젝트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공간에는 객관성이나 합리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서와 감흥이 녹아 있다. 이 또한 우리 건축이 지닌 일관된 독특함일 것이다.
구운 대나무(규격 9.9m)를 1/3로 재단한 길이 3.3m를 한 층 높이로 맞추고 건물 전체 곡면을 마감했다.(흥해랑, 2023)
귤밭에 흔하게 있던 쉼터인 원두막을 높은 전망대와 같은 파빌리온으로 재해석한 온두막(의귀소담, 2021)
문이 없이 심리적 구획으로만 이뤄진 내부 공간(트믐)
(왼쪽) 경량목구조와 중목구조의 혼합. 곡선 지붕을 구현하기 위해 일반적인 지붕 마감재인 징크를 재료 손실이 나지 않게 재단해 사용했다.(강릉 지안이네, 2018), (가운데) 휘어진 3차원 경사지붕을 구현하기 위해 목구조, 철골조, 철근콘크리트조 세 가지 구조를 혼합한 하이브리드 구조를 적용했다.(제주 삼달오름, 2019), (58쪽 오른쪽) 삼각지붕과 포물선 지붕의 공존(영평동 주택&카페, 2023)
비일상의 변용
사무소 초기, 200년 된 제주의 돌집을 스테이로 개조(토리코티지×카레클린트, 2016)할 때였다. 동네에는 “허물어져 가는 썩은 돌집을 고친다”는 소문이 돌았고, 주민들이 매일 찾아와 한마디씩 집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대화의 끝에는 항상 “허물고 새로 짓지 왜 고치려 하냐”는 핀잔이 따라왔다. 하지만 스테이를 오픈하자 이곳은 외지 사람들이 찾아오는 동네의 명소가 됐다.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제주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다른 시간과 공간을 향유하던 타자(육지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특별한 비일상의 공간으로 바뀌는 관점의 전환을 깨닫게 됐다. 건축에서 새로운 경험은 형태에 국한되지 않는다. 타자의 시선을 통해 관성적인 사고를 비틀 때 많은 가능성이 열린다. 그 이후로 우리는 작업을 시작할 때 의도적으로 비일상적 시각에서 접근하고자 노력하며, 이전에 시도했던 비일상적 관점도 다시 비틀어 낯설게 보려 한다. 공간의 쓰임에 변화를 주거나, 고착화된 공간의 위계나 질서를 뒤바꾸는 등, 비일상성을 건축에 투영하는 과정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객관화하며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도록 이끌었다. 어쩌면 이러한 관점의 변화가 숨가쁘게 변화하는 사회와 문화 속에서 고정된 실체일 수밖에 없는 건축이 유연하게 대응하는 해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시도에 대한 집착
우리의 건축은 거창한 도전(challenge)이라기보다는 집착에 가까운 시도(try)라 할 수 있다. 그것이 독특한 형태와 공간을 구현하기 위해 나름의 건축 어휘를 축적하며 달려온 고집스런 여정과 태도를 설명할 수 있는 동력이었다. 건축을 진행하는 과정은 보물을 찾아 나선 탐험대의 여정과 같다. 두려움이 따르지만 험난한 여정을 극복하려면 다양한 전략과 대비책이 있어야 한다. 손 안에 쥔 충실한 지도(도면)만으로는 현장에서 맞닥뜨릴 변수와 위험에 대처할 수 없다. 시간, 비용 등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과설계’에 가까운 해법을 차곡차곡 쌓았기에 우리는 탐험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 여정의 끝에서 건축가와 건축주, 그리고 사용자가 함께 보물을 발견하고 누린다면, 이 또한 의미 있는 수고가 아닐까.
벽돌을 세 번 잘라 곡면을 마감해 시공비를 절감했다.(제주 삼달오름)
단독 주택과 카페가 내부 중정을 함께 공유하는 독특한 구조(영평동 주택&카페)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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