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6년 7월호 (통권 704호)


Axonometric diagram ©Lee Dongmin
기억 위에 놓인 집
문선재(文善齋)는 시인 부부의 딸인 인문대 교수를 위한 집이다. 시인이었던 부모가 생전에 머물며 기억을 쌓아온 자리에 새로 지은 작은 주말 주택이자, 문학인을 위한 조용한 커뮤니티 공간이다. 부모 세대의 문학적 유산을 기리는 동시에 시와 문학, 그리고 주변 자연이 현재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안식처를 만드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다. 이 집에서 건축은 기억을 재현하거나 과거를 보존하기 위해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오히려 풍경과 삶의 뒤편으로 물러서는 비기념비적 태도를 통해 기억이 현재 속에서 다시 경험되도록 한다. 설계는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기보다 대지가 품어온 시간과 이미 존재해온 시선, 그리고 그곳에 머물러온 방식을 읽어내어 공간으로 번역하는 과정이었다.



땅의 분할이 건축이 되다
문선재의 공간 설계는 ‘땅을 어떻게 나누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대지를 네 개의 영역으로 분절하여, 빛과 바람, 시선과 머무름이 각기 다른 장면을 이루도록 했다. 이 분할은 단순히 경계를 긋는 작업이 아니라 하루의 시간과 일상의 행위가 서로 다른 장면으로 펼쳐지게 하는 공간적 장치다.
네 개의 영역은 건축가가 새롭게 부여한 질서라기보다 이미 이 대지 위에 축적되어 있던 시선과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과거 이곳에 살았던 시인 부부는 함께 생활하면서도 서로 다른 방향의 풍경을 즐겼고, 그에 따라 하루의 리듬과 머무는 자리가 자연스럽게 달라졌다. 지금 이 집에 머무는 부부 역시 같은 공간을 공유하지만, 각자의 취향에 따라 바라보는 풍경과 머무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대지는 이렇게 삶 속에서 형성된 다양한 시선과 활동이 겹치며, 이미 비물리적으로 나뉘어 있었다.
설계는 이 보이지 않는 분할을 드러내는 일에 가까웠다. 네 개로 분할된 공간은 각각 서로 다른 풍경과 감각, 그리고 생활의 리듬을 담아낸다. 하나는 경사진 대지 위에서 동쪽으로 크게 열리는 산의 풍경을 향하며, 처마 아래에 앉아 그 풍경을 조용히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다. 다른 하나는 좌식 다실에 앉아 작은 후원을 마주하고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내밀한 공간이며, 또 다른 하나는 어머니가 사랑하던 산자락의 풍경을 담아내는 자리이다. 마지막 하나는 외부 데크를 중심으로 사람들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커뮤니티 공간이자, 대지 아래 앞으로 조성될 정원과 연계되는 열린 공간으로 계획되었다. 이렇게 나뉜 대지는 다시 건축 내부로 연장되어 중심에서 서로 만난다. 안과 밖은 분리되지 않고 서로를 향해 열리며 느슨하게 연결된다.
건물의 배치는 교차하는 두 개의 벽에서 출발한다. 두 벽은 공간을 네 개의 영역으로 나누고, 교차 지점은 비워 두어 네 공간이 서로 이어지도록 했다. 이 지점은 내부와 외부가 맞닿으며 공간이 확장되는 중심이 된다. 두 벽 사이에는 부드러운 곡선 지붕 아래 진입 공간을 두었다. 이 곡선은 단순한 형태적 제스처가 아니라, 외부에서 내부로 이어지는 시선과 몸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전환시키는 장치다. 마치 회전문을 통과하듯, 방문자는 직선으로 진입하는 대신 부드러운 회전의 흐름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선다. 이 짧은 전이 공간은 외부 풍경에서 내부 생활공간으로 시선을 서서히 옮겨놓으며, 작은 집에 예상보다 깊은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투명한 면과 불투명한 벽이 켜를 이루며 겹쳐지고 높이의 차이는 공간의 밀도와 분위기를 달리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문선재의 공간은 하나의 단일한 장면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이 교차하는 여러 장면의 집합으로 경험된다.


시선의 켜와 공간의 확장
문선재에서 공간은 면적이 아니라 시선이 겹쳐지는 방식을 통해 확장된다. 외부 데크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다시 뒷산으로 이어지는 시선, 그리고 거실 앞 외부 벤치에서 침실 옆 산자락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시선의 흐름은 하나의 장면이 아니라 여러 겹의 ‘켜’를 형성한다. 이 시선의 켜들은 서로를 가리지 않고 겹쳐지며, 공간을 앞뒤로 깊게 만든다. 이러한 다중 시선의 구조 속에서 문선재의 공간은 실제 크기보다 훨씬 넓게 인식된다.
몸의 위치와 자세에 따라 달라지는 공간 경험은 문선재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현관 옆에는 좌식 평상을 두었다. 좌식과 입식의 혼용은 시선과 공간의 관계를 한층 다층적으로 만든다. 바닥에 앉았을 때, 서서 머물 때, 창가에 걸터앉았을 때 동일한 공간이 전혀 다른 깊이와 방향성을 드러낸다. 낮은 시선에서는 내부의 응축된 관계가 강조되고, 높은 시선에서는 외부 풍경과의 연결이 강화된다. 이를 통해 문선재의 공간은 고정된 하나의 장면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경험의 연속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공간의 깊이는 미닫이문을 통해 조절된다. 화장실과 창고를 제외한 모든 문이 미닫이문이며, 이는 공간을 닫고 여는 방식에 따라 시선의 켜를 조정한다. 문이 열릴 때 공간은 연속적으로 확장되고, 닫힐 때에는 깊이가 응축된다. 사용자는 이 개폐를 통해 공간의 거리와 밀도를 능동적으로 조절한다.



지워내기에서, 여백을 나누는 집으로
문선재의 설계 과정에는 건축주와 건축가가 과거에 함께 작업했던 윤동주기념관(「SPACE(공간)」 640호 참고)에서의 경험이 스며들어 있다. 100여 년 전 기숙사로 지어졌던 문화유산을 기념관으로 재탄생시킨 윤동주기념관 프로젝트에서, 건축주와 건축가는 기획과 설계부터 초기 운영까지 긴밀히 협업했다. 조경과 조명 디자인 또한 당시와 같은 팀이 함께했다. 윤동주기념관에서 건축은 스스로를 앞세우기보다, 그 자리에 남아 있던 기억이 드러나도록 한 발 물러서는 방식으로 존재했다. 그곳에서 ‘지움’은 삭제가 아니라, 기억을 또렷하게 하기 위한 절제의 태도였다. 문선재 역시 이곳에 머물렀던 시인 부부의 시선과 앞으로 이 집에서 살아갈 부부가 마주할 풍경을 담아내는 배경으로 자리한다. 문선재는 건축이 말하기보다 물러섬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시선이 겹쳐지는 집이 되기를 바란 결과물이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 VMSPAC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염상훈(연세대학교)+최선용(광주대학교)
연세대학교 ‐ 김민지, 김한준, 이동민, 홍수민 / (주)종합건축사사무소무예(이시우)
경기도 양평군
단독주택
620m²
120.08m²
120.08m²
지상 1층
2대
4.15m
19.37%
19.37%
철근콘크리트조
치장벽돌, 노출콘크리트
친환경수성페인트
(주)케이구조
코담기술단
초록선(배용은)
2023. 4. ~ 2024. 1.
2024. 3. ~ 2025. 1.
김성연
디비디비스튜디오(장동연)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WM
민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