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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약판으로서의 플랫폼

글
박정현
진행
박세미 기자

근대문학은 이식된 것이다. 문학평론가 임화의 말이다. 지난 세기 한국문학 연구의 한 갈래는 이 테제를 극복하는 것, 이식의 결과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내재적 발전으로 우리 문학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이식론과 내재적 발전론에 얽힌 수많은 논의, 문학과 건축의 차이를 세세히 논한 다음, 이 테제로 한국 현대건축을 이야기해야겠지만 짧은 지면을 핑계 삼아,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이 테제를 변형하고 급진화해보자. 현대건축은 이식된 것이다. 현대건축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다른 모든 지역에도 이식된 것이다. 현대건축은 단일한 기원에서 출발해 각지로 퍼져나간 것이 아니다. 모든 곳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추구되고 기존의 것과 갈등을 일으키며,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시작 시점, 행위자의 역할, 전개 양상 등의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한 공동체(그 단위를 지역, 도시, 국가 무엇으로 상정하든) 내에서 저절로 생겨나 자연스럽게 그 이전의 건축을 대체한 사례는 없다고 해도 좋다. 현대건축은 대단히 의식적인 행위의 결과이자,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다. 그리고 이를 추동하는 것은 현실에 선행하는 이념이나, 앞서 나간 타자(선례나 참조물이라고 부르는) 등이었다. 이 간극의 낙폭이 클수록 현대건축을 향한 불안과 욕망은 컸다.

 

이 간극을 메우고 문화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현대건축은 플랫폼 또는 도약판이 필요했고, 그것들은 다른 무엇보다 활자로 인쇄된 종이 뭉치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새로운 건축의 산업과 지식이 확산되고 굳건해지는 데, 잡지는 무엇보다 중요한 플랫폼이었다. 미국의 「아키텍처럴 레코드」 (Architectural Record, 1891년 창간, 이하 연도만 표기), 영국의 「아키텍처럴 리뷰」 (Architectural Review, 1896), 이탈리아의 「카사벨라」 (Casabella, 1928)와 「도무스」 (Domus, 1928), 프랑스의 「라키텍튀르 도주르디」 (L’Architecture d’Aujourd’hui, 1930) 같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각국의 유서 깊은 건축 잡지들은 저마다 달랐던 시장과 사회 속으로 현대 건축을 침투시키는 도구였고 건축가들과 비평가들이 모이는 장이었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여러 아방가르드 운동들 역시 전투적인 행동대원만큼이나 이데올로기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강령을 유포할 잡지가 필요했다. 바우하우스(Bauhaus), 게(G), 데 스틸(De Stijl) 등의 아방가르드 운동 또한 잡지 없이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런 사정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매체와 담론 없이 현대건축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 「조선과 건축」 (朝鮮と建築, 1922)이 존재했지만, 한반도 내 일본인 건축인들의 단체였던 조선건축회의 기관지가 지닌 한계는 분명하다. 해방 후 대한주택영단이 「주택」 (1959년 7월), 건축가협회가 「건축가」 (1961년 4월), 건축사협회가 「건축사」 (1966년 7월)를 펴내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건축 관련 회사였던 대한주택영단이 잡지를 통해 지식의 축적과 확산을 도모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창간호에서 이사장 김윤기가 밝힌 대로 “보다 더 좋은 집을, 보다 더 싸게, 보다 더 많이”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대한주택영단의 잡지는 협소한 주제와 독자군 등 모든 면에서 당시 폭증하던 ‘건축’에 대한 요구와 담론을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건축가」나 「​건축사」의 한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60년 단 2호밖에 발간되지 못하고 폐간한 잡지 「현대건축」의 발간사에서, 건축가협회 회장 김재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건축계가 그동안 대망하여 오든 순수한 건축 종합 잡지 「현대건축」을 손에 들게 되니 이 감개무량함을 금치 못하겠다. ... 한국 건축 문화 운동사에 한 ‘에포크’를 이룩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간절한 바람, ’순수한 건축 종합 잡지’를 통해 ’에포크’(한 시대의 시작)를 온전히 선언하기 위해서는, 1966년 11월 「공간」의 창간을 기다려야 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창간된 미국과 유럽의 잡지와 1960년대 중반 창간된 「공간」의 수십 년 시간 차이는 서구와 한국에서 현대건축이 본격적으로 문제시된 시점의 차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많은 이들의 소망대로, 잡지는 한 시대를 열었다. 1966년 창간 이래 20세기 내내 「공간」은 한국 현대건축의 절대적인 플랫폼이었다. 회화와 조각 등의 미술과 무용, 연극 등의 무대 예술을 망라한 「공간」은 건축이 다른 예술 분과의 독자층에게 소개되고 인적 교류가 확대되는 데 기여했으면, 일본, 미국, 북유럽, 남미 등 전 세계 현대건축에 대한 정보가 국내에 유입되는 몇 안 되는 통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 세기 한국의 모든 분야를 구속한 물음,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묻고 답해지는 자리였다. 이런 활동은 잡지 「공간」과 연계되거나, 때로는 무관하게 설계사무소 공간이 개최한 또 다른 플랫폼이었던 포럼, 강연, 답사를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이런 활동은 공간만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공간사옥이라는 장소의 아우라, 잡지 발행으로 쌓은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 등을 활용한 공간의 시도만큼 플랫폼으로 부를 만한 예는 드물다. 

 

그러나 「공간」의 큰 영향력만큼, 「공간」이 드리운 그늘도 짙었다. 잡지 전문 회사가 아닌 설계사무소에서 발간된 만큼 설계사무소 공간의 장단점에서 「공간」은 자유롭지 않았다. 「공간」은 아틀리에적 감수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사회적 변화에 대해 둔감했다. 우리는 「공간」의 지면을 통해서 건축의 기술적이고 산업적인 측면과 한국 사회의 역동적인 변화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매체/플랫폼이 내용/목적지를 상당 부문 미리 결정했다. 이후 등장한 플랫폼들은 건축의 외연을 조금씩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1977년 창간한 종합 디자인 잡지 「꾸밈」은 건축의 형태와 미학적 측면을, 1981년 첫 호를 낸 「건축문화」는 건축시장과 산업의 일면을, 1985년 시작한 「건축과 환경」은 비평적 담론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며 건축의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이는 무엇보다 건축계의 외연이 확대된 결과였다. 1966년 「공간」이 창간될 당시 건축관련학과 대학교의 수는 17개였던 데 반해, 「건축과 환경」은 56개 대학의 졸업생과 재학생을 일차적인 독자로 상정할 수 있었다. 

 

이 잡지 플랫폼들을 가동시킨 동력은 중심과 주변의 높이 차였다. 미국과 유럽, (결코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일본 건축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시차를 두고 국내에서도 재현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국내에서 유통될 가능성이 높은 이슈와 아이템들을 미리 포착해 한국의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일은 플랫폼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이 플랫폼을 도약판 삼아 먼저 도달한 이들을 따라잡아야 했다. 생산과 재현을 둘러싼 역량 차이가 분명하다는 인식이 있었기에, 이 과정은 조금도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메타볼리즘, 브루탈리즘,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등 때마다 유입된 건축 선진국의 사조는 강렬한 호기심의 대상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1980년대 후반까지 잡지 매체는 한국 건축이 자신의 자리, 타자를 통해 자신의 모더니즘을 재확인하는 장소였다. 다시 말해 쉼 없이 낙차를 인식하는 동시에 이 낙차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가다듬는 일이었다. 1980년대 말 한국 사회의 급변과 함께 여러 이론과 담론이 폭발했을 때, 낙차를 조절해 물줄기의 방향을 조정하는 기존 플랫폼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재설정되어야 했다. 청년건축인협의회와 4.3그룹을 비롯한 1990년대 초 크고 작은 움직임들이 기존 매체 중심의 플랫폼 바깥에서 새로운 플랫폼이 되고자 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플랫폼은 다른 무엇보다 인쇄된 (또는 복사된) 종이였다. 세미나든 기행이든 모든 종류의 만남은 인쇄된 문서를 생산해내야 했다. 이 종이는 활동의 증명서이자 다음 모임을 위한 초대장이었다. 

 

세기의 전환기는 하나의 산으로 펼쳐져있던 담론의 지형이 다수의 언덕으로 바뀌는 시기였다. 그리고 시차로 번역된 높이의 차이가 차츰 적어지는, 또는 그 차이에 점차 무감해지는 과정이었다. 플랫폼은 더 이상 도약대가 아니다. 도약해 극복해야 할 높이가 사라졌거나, 그럴 필요를 예전만큼 느끼지 않는 시대, 다른 곳으로 건너가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외부를 바라보는 일에 몰두하는 시절이었다. 세계 각국의 (비슷비슷한) 신작들을 매일 아침 메일함에 쌓아두는 메일링 서비스와 다른 장소에 있다는 자각보다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SNS는 플랫폼 자체를 하나의 경제 모델로 격상시켰다. 디지털 네트워크는 같은 자본주의, 같은 위기에 처해있다는 인식, 소위 동시대성을 주입했다. 특정 설계사무소의 구성원을 중심으로 한 답사에서 건축을 전공하지 않은 불특정 다수를 염두에 둔 포럼에 이르기까지, 최근의 모임들은 형식, 지향점, 진행 방식, 참여자 등에서 제각각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산을 발견하고 오르려고 하기보다는 언덕 주위에 난 길을 거닌다. 높은 전망대를 세워 전체를 조망하려 욕망하지 않는다. 시차가 사라진 자리에 등장한 장소에 대한 예민한 감각으로 자신이 자리 잡은 곳에서 창을 내려고 시도한다. 이 창에 비친 모습이 무엇인지 이제 묻기 시작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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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현
박정현은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를 비롯해, 『전환기의 한국건축과 4・3그룹』(이하 공저), 『아키토피아의 실험』, 『중산층 시대의 디자인 문화』 등을 썼다.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 『건축의 고전적 언어』 등을 번역했으며, <2018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스테이트 아방가르드의 유령>을 비롯해 <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등의 전시 기획에 참여했다. 현재 도서출판 마티의 편집장으로 일하며 건축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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