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연세대학교의 핀슨관은 새단장을 마치고 윤동주기념관으로 문을 열었다. 100년 가까이 된 건물을 기념관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건축, 문학, 전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힘을 모았다.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에서 콘텐츠 생성 및 기획을 담당한 김성연, 대학 내 건축 전문가로 참여해 공간 기획과 설계를 맡은 염상훈과 성주은, 외부 전문가로 전시 및 콘텐츠 기획을 담당한 정다영과 정성규를 만나 윤동주기념관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터뷰 김성연(윤동주기념관 총괄기획실장), 성주은(연세대학교 교수), 염상훈(연세대학교 교수), 정다영(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정성규(TACT 공동대표) × 방유경 기자
ⓒKim Kyoungtae
방유경: 핀슨관이 윤동주기념관으로 바뀌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프로젝트의 출발이 궁금한데 윤동주와 핀슨관은 어떤 관계가 있나?
김성연: 핀슨관은 1922년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로 지어졌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1938년과 1940년에 이곳에서 생활했다. 이때는 그가 집중적으로 창작 활동을 했던 시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68년 11월 윤동주의 첫 시비가 핀슨관 앞에 세워졌는데, 이곳이 추모와 헌화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면서 대학에서도 윤동주기념관 건립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있었다.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2013년 윤동주의 유족이 대학에 육필원고를 비롯한 유품을 기증하면서부터다. 2018년에 윤동주기념관 건립 준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방유경: 캠퍼스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건물로 2019년에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건축적으로 어떤 특징이 있는 건물인가?
염상훈: 윤동주기념관은 다락방을 포함한 3층 규모의 석조건물이다. 1944년 이후로는 신학관, 음악관, 대학신문사로 사용되었고, 가장 최근에는 법인사무처가 2018년도까지 사용했다. 이 건물이 주목받은 것은 윤동주가 머물렀다는 사실 때문이다. 법인사무처로 쓰일 당시에도 사무실 한곳에 윤동주 기념실이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건축적으로 특이한 것은 1층은 내력벽 구조이고 2층은 기둥-보 구조라는 점이다. 공간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곳은 3층 다락이다. 윤동주가 신입생 시절 시인 송몽규, 기자 강처중 등과 함께 생활했던 이곳은 목재 트러스, 도머창 등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방유경: 기념관 건립을 위해 2019년에 공간을 설계하는 건축가, 전시 콘텐츠를 기획한 문학 연구자, 전시기획자 등 전문가들이 모여 전담팀(TF)을 구성했다. 서로가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도 있었을텐데 협업의 과정은 어떠했나? 각자 역할은 어떻게 나뉘었나?
김성연: 내가 문과대학을 대표하다 보니 처음에는 모두 나에게 질문을 했다. “윤동주를 한마디로 말하면?”하고 물어왔는데 그날부터 잠을 못 이루기 시작했다. (웃음) 거꾸로 “시를 건축으로 표현해달라”, “국립현대미술관을 넘어서는 전시가 되게 해달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내가 고민한 것은 윤동주를 둘러싼 다양한 입장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이었다. 윤동주의 유족, 문단, 대학과 연구자, 그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 등 여러 주체를 고려해야 했다.
정다영: 처음 협업을 제안받았을 때, 평소 미술관에서의 역할과 여기서의 역할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큐레이터는 내용에 대한 장악력도 있어야 하는데 내가 윤동주 전문가는 아니지 않나. 근대건축이라는 물리적 조건과 윤동주라는 콘텐츠를 매개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판단했고 사진 작가 김경태, 영상 작가 더도슨트, 가구 디자이너 김건태(파티 중간공간제작소) 등 작업에 적합한 작가들과 협업의 구도를 짰다. 기획자와 작가, 건축가 등 각자의 언어는 확실히 달랐는데, 서로 존중하면서 이해하려 노력한 결과 그 간극이 공간의 매력이 된 것 같다.
정성규: 초반에 내가 맡았던 작업은 자료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이었다. 전시에서는 전부가 아닌 일부를 보여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품이나 아카이브 자료들을 중요도와 형식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곧 서로가 소통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예를 들어 육필원고가 있다면 어떤 원고가 어떤 면에서 더 중요한지 간략화해 엑셀로 정리하는 것이다. 물론 이를 선별하는 과정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서로의 시각차를 존중하며 중요한 것을 되짚는 계기가 되었다.
방유경: 이러한 논의를 거쳐 결정된 중요한 방향은 무엇이었나? 각 공간의 기능, 전시 형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염상훈: 기존의 기념관들처럼 한 인물을 기념하고 박제해서 보여주는 건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 안에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 착안해 윤동주와 관련된 자료가 모이고 만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정보가 생성되는 창조 공간이 되는 게 중요한 방향이었다. 그래서 1층은 윤동주의 유품과 작품을 시기, 주제, 장소에 따라 보여주는 전시실로, 2층은 그와 관련된 정보가 모이고 생산되는 라이브러리로, 3층은 새로운 전시와 모임이 이루어지는 열린 공간으로 구성했다.
김성연: 가장 오래 고민한 부분은 전시의 첫 장면이었다. 국내외 문학관과 기념관 등을 답사하면서, 일대기를 나열하거나 초상 사진을 크게 보여주는 식의 직접적인 방식은 피하고 싶었다. 입구를 들어와 처음 만나는 것은 김경태의 작품으로, 사진 속 물건들이 윤동주가 남긴 유품의 전부다. 근현대 유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전시의 시작점이 된 것이다. 내부 전시에서도 연표를 직접 보여주지 않고, 서랍형 전시를 구성하여 전시물과 아카이브 사이를 연동했다.
정다영: 전시물을 보여주는 방식은 가구 디자인을 맡은 김건태의 생각이 많이 반영되었다. 우리는 문학이라는 콘텐츠를 박제하지 않고 영상이나 낭독 등의 다양한 형태로 보여주려고도 시도했다. 언어라는 매체, 문학이라는 형식을 어떻게 탈피할 수 있을지 팀 안에서 상의했는데,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수화나 점자로도 제작을 고려했다.
김성연: 텍스트로 이루어진 문학에 형식이 있다면 원고지 묶음이나 책의 질서인데 서랍이란 가구와 공간으로 어떻게 풀지 고민이 많았다. 129편의 시를 남기고 27살에 생을 마감한 윤동주의 삶은 박경리와 같은 작가와는 접근이 달라야 했다. 각 분야 작가들과의 협업은 관점과 발상을 전환하여 새로운 해석을 제안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협업을 통해 축적된 이미지와 영상은 온라인 전시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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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유경: 100년 가까이 된 건물을 리노베이션하면서 공간의 변형을 최소화하고 건축적 표현들을 절제했다. 이 과정에서 어떤 논의를 거쳤나?
염상훈: 건축적으로는 역사의 수많은 켜, 물리적 켜를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중요했다.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부분은 건물의 테두리를 구성하는 외벽과 창이었다. 그래서 외벽 안쪽으로 페인트가 여러 겹 칠해지고 벽지가 붙었던 흔적들을 그대로 드러냈다. 역사성을 띤 벽과 현대적인 전시 공간 사이의 관계를 고민했는데, 전시벽과 외벽을 이격시켜서 과거와 현재가 대비를 이루도록 했다. 원래 1층은 기숙사 공간이라 중앙 복도를 통해 각 실로 들어가는 구조였다. 외벽과 전시벽 사이에 생긴 공간을 통해 건물의 테두리를 따라 전시를 관람하도록 동선을 바꿨다. 전시실의 좌우 끝 방을 이동하면서 긴 복도를 멀리서 보게 되는데, 옛 공간감을 간직한 풍경 자체가 전시의 일부가 되었다.
성주은: 크게 달라진 것은 1층 슬래브 일부를 뚫어 만든 계단이다. 처음에는 슬래브를 뚫는 것을 문화재청에서 반대했다. 기능상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해 기둥과 보는 건드리지 않고 시공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구조체의 조각들도 함께 전시해 당시 건축물의 텍토닉을 보여주었다. 이 계단을 올라오면 수장고가 보인다. 원래는 법인사무처에서 만든 금고인데 긴 변용의 역사를 보여주는 요소여서 항온항습 기능을 보완해 ‘보여주는 수장고’ 형태로 바꿨다.
방유경: 기념관은 캠퍼스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다. 대학 안에 공공성을 띤 공간을 만드는 작업은 기획이나 설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김성연: 사실 캠퍼스 안에는 노천극장만 있고 실질적인 광장이 없다. 학생운동 시기의 백양로와 같은 문화적 구심점이 필요한데 이곳이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되길 바랐다. 대학 안의 기념관으로서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도 고민했는데 학문적인 것과 맞물려 2층에 전 세계의 윤동주 관련 자료를 모두 모은다고 생각했다. 이 자료들이 1층과 3층으로 흩어지는 것이다. 1층 서랍형 전시물 옆에 일련번호가 붙어 있어 전시 작품이 2층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출처를 확인할 수 있다.
염상훈: 같은 맥락에서 2~3층을 물리적으로도 개방된 공간으로 계획했다. 단순히 전시를 보는 곳이 아니라 머물며 다양한 활동이 일어나는 공간을 상상한 것이다. 탁 트인 밝은 공간인 2층과 과거의 감성을 재현한 3층을 통해 사람들이 온전히 공간의 가치와 매력에 이끌려 이곳을 찾기를 바랐다.
정다영: 개인적으로 얻은 큰 수확은 대학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작업하며 대학이 엄청난 유산을 간직한 장소임을 발견한 것이다. 근대에 조성된 캠퍼스 공간이 오롯이 있고, 그것의 발상기지로서 윤동주기념관이 존재하며, 이곳에 윤동주 이후 동교 출신의 유명 문인들의 이야기가 중첩된다고 생각하니 이 공간의 장소성이 새롭게 다가왔다. 식민지 시대의 캠퍼스 공간이 윤동주를 속박하는 게 아니라 그를 해방시켰던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주은: 최근 대학 안에서도 역사를 중요하게 바라보는 인식이 생겼다. 근대의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동주의 길’, ‘민주화의 길’, ‘선교의 길’ 등 연세 스토리텔링을 기획하기도 했다. 백양로 끝에 있는 윤동주 문학동산을 지나 만나게 되는 건물이 이곳이다. 단순히 건물 하나가 아니라 시공간의 역사적 맥락 안에 윤동주기념관이 있음을 경험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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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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