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전시장이 아니었던 공간을 갤러리로 변경하는 경우 첫 번째 문제는 창문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것이다. 창문은 벽면을 차지하고 시선을 끈다는 점에서 그림의 잠재적 경쟁 상대이며, 실제로 많은 창문들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바깥 풍경을 실내로 끌어들이는 액자로 작동한다. 전시장의 창문을 그대로 남겨둔다는 것은 창밖으로 보이는 동네의 성격과 그 건물의 역사를 앞으로 열릴 전시들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는 전시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일련의 영구 설치물이 전시 공간의 일부를 점유하고 있는 것과 같아서, 거기에서 전시를 하려고 하면 언제나 이미 반쯤 그려진 그림 위에 무언가 덧그리게 된다. 전시장을 순수하게 자기 완결적인 인공물들을 위한 공간으로 본다면 그것은 창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창문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우주 비행사들이 마치 화물처럼 선적되었던 초창기 유인 우주선에 없어도 되는 창문이 달렸던 것은 순전히 인간적인 요구 때문이었다. 우리는 시선을 던질 수 있는 창문을 필요로 한다. 이는 우리가 계속해서 전시를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시장의 사물들이 눈앞에 제시되기 위해 일부러 꺼내어진 것임을 고려하면, 이들의 입장에서 창문은 조망보다 채광의 용도로 좀 더 쓸모 있다. 일종의 광원으로서 창문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눈을 보좌한다. 그것은 공간을 빛으로 채우는 구멍이다. 미술관을 신축하는 경우 어떻게 시야를 교란하지 않으면서 빛의 통로를 낼 것인가, 그렇게 들여온 자연광을 어떻게 인공광과 혼용하여 조명 전반을 통제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상적인 전시 공간은 스스로 빛나는 듯이 보여야 하지만 그 빛이 너무 강하면 공간 자체가 전시물이 된다. 이는 단순히 조도의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중앙 홀은 그렇게 밝지 않지만, 햇빛이 들어오는 원형 천창 아래 나선형 경사로를 따라 반짝이는 전등들과 작은 창문들이 이어지면서 천구를 연상시키는 기념비적 공간을 이룬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방사형의 빛과 그것을 향해 상승하는 운동은 미술관 전체에 어떤 신성함의 소망을 불어넣는다.
반면 과천관보다 나중에 지어진 서울관에서 빛은 천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퍼져 있는 것으로 연출된다. 자연광을 활용할 수 있는 곳이라면 공간의 옆면이나 윗면에서 전반적으로 빛이 스며들도록 하고, 인공 조명을 쓰더라도 빛이 고르게 퍼지도록 해서 명암에 의한 극적 효과를 최소화한다. 필요에 따라 밝은 방과 어두운 방, 높은 방과 낮은 방이 있을 수 있지만 거기에 상징적 의미가 부여되지는 않는다. 여기서 미술관은 더 높은 곳을 지향하는 예술의 만신전보다 더 다양한 것들의 교류를 증진하는 문화의 의회로 상정된다. 수평적 플랫폼으로서 미술관은 따로 창문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이미 충분히 열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방성은 미술관의 각 전시실에 불러내어진 것들이 서로를 침범하거나 외부로 흘러 넘치지 않도록 잘 닫혀 있음을 전제한다. 사람들과 사물들, 빛과 공기의 움직임은 비가시적으로 규제된다. 투명도가 조절되는 물리적 벽체와 별도로 어떤 보이지 않는 칸막이가 미술관의 내부와 외부, 중심과 주변을 구획한다.
벽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나 그렇다고 중성적인 것도 아니다. 외부에 대해 무언가 보호하는 자세를 취한다는 점에서 벽은 안팎을 구별한다. 그러니까 미술관은 예술의 이름으로 옹호되어야 하는 것들을 위해 벽으로 두른 공간이다. 전통적으로 미술관은 지나간 과거에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이르기까지 지금 여기와 다른 세계들의 유산이 흩어지지 않도록 모으고 재활성화하는 곳이었다. 누군가는 거기서 낯설게 반영된 당대의 현실을 식별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그런 현실에 종속되지 않는 어떤 자율적 질서의 가능성을 목격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발견들은 모두 각자가 어디로 움직여 갈 수 있는지 상기시키는 하나의 지침으로 기능했다. 어쩌면 이 같은 기억 자체가 미술관이 자신의 보유물로부터 불러일으키는 또 하나의 꿈일지도 모른다. 실제의 미술관이 자신의 이상과 완전히 부합하는 날은 한없이 멀리 있다. 그럼에도 이 예외적인 공간은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잘못된 장소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세계에서 어딘가 다른 곳을 향한 창문을 그려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창문은 문이 아니라서 그것을 통해 저편으로 건너가진 못한다. 오히려 창문이 있다는 것은 거기에 벽이 있다는 신호이다. 그렇다면 미술관의 보이지 않는 벽에는 어떻게 창문을 낼 수 있을까? 하나의 예로, 김민애는 전시장에 빛을 퍼뜨리거나 반사하는 평면을 달아서 가짜 창문 같은 것을 만들어놓곤 했다. 그것들은 미술관의 건축적 요소들을 흉내낸 다른 사물들과 함께 공간을 일시적으로 뒤틀면서 전시장에서 보여야 하는 것과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 경계가 어떻게 그어지는지를 질문했다. 최근 그는 2020년 올해의 작가상 전시의 일환으로 서울관의 지하층에서 지상층으로 이어지는 높고 긴 전시실에 미술관 공간을 물리적으로 반영하는 여러 가지 사물들, 거울들, 가짜 창문들을 설치했다. 나는 이들을 통해 처음으로 그곳의 채광창들과 마주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미술관은 스스로 빛나지 않으며 자기 완결적으로 성립하지도 않는다. 다양한 사물들과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일하면서 그곳에 빛을 끌어온다.
그 빛은 진짜일까? 창문을 흉내낸 설치물은 전시실을 밝히는 빛의 출처를 가리켜 보이며 이렇게 말한다. ”진짜 빛은 바깥에서 오고, 나는 가짜이다.“ 그러나 천창을 통해 걸러져서 전시 공간을 부드럽게 채우는 빛은 이미 바깥에서 눈을 찌르거나 몸을 데우는 햇빛과는 조금 다른 빛이다. 가짜 창문은 단순히 진짜 창문이 아닌 것이 아니라 미술관에 가설되는 인공 창문의 모형으로서 거기 있다. 전시가 눈에 보이려면 전시장의 조명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전시가 보여줘야 할 어떤 가상의 빛을 모사함으로써 전시장을 빛나게 한다. 미학적 전통에 따르면 그 빛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질과 합치되는 자유 속에 있다는 의미에서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는 곳에서 온다. 가짜 창문은 그 빛이 벽의 저편에 있음을 표시한다. 그것은 역설적인 교통 표지판처럼 미술관의 바깥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도 아닌 곳, 실제로 없는 곳과 없어도 되는 곳 사이의 가느다란 틈새를 가리키며 빛난다. 그것은 마지막 남은 희망일까, 아니면 끝까지 해제되지 않는 저주일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제2전시실. 김민애의 <1.안녕하세요 2.Hello>(<올해의 작가상 2020>) 전시 전경. / Image courtesy of MMCA
▲ SPACE, 스페이스, 공간
ⓒ VMSPAC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윤원화
윤원화는 시각문화 연구자다. 저서로 『그림 창문 거울: 미술 전시장의 사진들』,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등이 있다.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일민미술관, 2014)를 공동 기획했고,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에서 ‘부드러운 지점들’을 공동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