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서가는 용산 한복판, 고층 오피스 지구의 상업시설 사이에 자리 잡은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다. ‘서가’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지난 5월 말 문을 연 이곳의 책장은 현재 비어있다. 빈 책장은 방문자들이 개인의 감정을 마주하고, 표현하고, 기록한 것들을 모아 채워질 예정이다.
이 공간을 기획한 이재준 리마크프레스 대표와 운영하는 서울문화재단의 황선영 팀장, 성승환 과장을 만나 새로운 개념의 공공공간에 관해 이야기 나누었다.
인터뷰 이재준 리마크프레스 대표 x 황선영 서울문화재단 팀장 x 성승환 서울문화재단 과장 x 오주연 기자
오주연: 의외의 장소에 위치해 있어요. 이 공간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궁금해요.
황선영: 용산이 재개발되는 과정에서 공공의 목적으로 기부채납된 공간입니다. 서울시에서 정책적으로 이곳을 예술 교육을 위한 공간으로 지정하고,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도록 했어요. 그렇게 용산 센트럴타워 업무동 1층에는 감정서가, 그리고 공공시설동 5, 6층에는 아동∙청소년 예술교육센터가 자리 잡게 됐죠. 접근성이 좋은 1층에는 일반 시민 누구나 와서 예술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어요.
이재준: 원래 계획은 북카페였어요. 책장으로 가득 차 있었고요. 저는 북카페가 별마당도서관처럼 책을 장식하는 공간으로 만들어지는 것에 회의를 느껴요. 저는 책을 매우 좋아하고 책은 장식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책을 읽는 행위를 새로운 예술적 경험으로 만들고 보고 싶었어요. 우리가 책을 읽을 때 가장 좋은 건 무엇일까? 책 전체를 읽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문장에서 느끼는 감동이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고, 그렇게 개인의 감정이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장을 통해 예술적 경험을 사람들한테 옮겨보려고 했죠. ‘감정’이 드러나는 ‘문장’을 모아서 ‘책’을 만드는 곳, 그게 기획의 시작이었어요.
오주연: 감정을 드러내는 문장을 쓴다는 것이 갑자기 이뤄지기 어려울 수 있는데요. 어떻게 방문자들의 행동을 만들고 있나요?
이재준: 여기가 비어 있으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저희 운영 멤버들이 감동 받은 문장들을 먼저 필사해서 올려놓고, 오시는 분들이 그 필사를 통해서 또 다른 문장들을 쓸 수 있게 유도했어요. 문장을 살펴보면서 나를 툭 건드는 무언가를 가져다 쓰기도 하고, 필사의 경험을 하다가 내 문장을 기록하기도 하고요. 자신의 문장을 다시 공유하고, 그런 과정들이 순환하고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만년필, 붓 펜, 연필 등의 필기구와 10가지 색의 잉크가 준비되어 있어, 다양한 질감과 색상으로 감정을 적어볼 수 있다. ⓒ오주연
오주연: 개인이 작성한 감정카드를 모아 놓은 ‘문장’ 벽은 감정서가를 대표하는 공간 같습니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전시하는 동시에 SNS에서 소비될 이미지까지 세심하게 고려한 연출로 보여요.
이재준: 원래 벽면을 따라 책장이 놓여 있었는데, 다 없애고 대신 이 공간에 파노라마 이미지가 필요할 것 같았어요. 개인이 경험하는 낱장의 파편들이 이렇게 전체적인 집합을 이루었을 때 누구에게나 의미 있는 낱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런 풍경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이것은 결국 책으로 이어지는 과정이에요. 내가 썼던 것을 모아놓고 그것을 다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 이렇게 펼쳐놓고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집어내는 그런 경험이 디지털 시대에서는 점점 사라지고 있죠. 그래서 문장의 파노라마를 통해 문장 사이를 산책하듯이 이 하나하나를 보면서 다른 감정을 경험하고 기억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경험을 의도했어요.
오주연: ‘문장’ 반대쪽 벽에는 빈 파일들이 많이 꽂혀 있는데요. 개인의 카드를 모으는 용도인가요?
황선영: 멤버십을 운영하고 있어요. 멤버십에 가입하면 본인의 앨범이 생기고 그 앨범에 나의 문장, 나의 기록을 차곡차곡 쌓아요. 어느 정도 쌓이면 그걸 책으로 만들 수 있는 과정을 워크숍을 통해서 해나가고 있어요. 아직 개관한 지 3개월이 채 안 되어서 비어있지만, 계속 쌓이고 나누는 공간이 될 거예요. 감정서가의 책장은 기성의 책들이 아니라, 시민들의 이야기로 채워지겠죠. 그 해에, 그달에, 방문했던 어떤 때 시민들의 삶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오주연
오주연: 손으로 문장을 쓰고, 직접 책을 만드는 행위 등 아날로그 감성이 드러나는 공간 같아요.
이재준: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손으로 쓰는 일이 점점 줄어들죠. 그렇게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면, 쓰기를 새롭게 함으로써 예술적 경험을 제공한다고 보았어요. 필사를 하면서 문장에 담긴 내용을 쓰고,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내용이 된다면 그건 또 다른 경험이라고 생각한 거죠. 요즘 세대에게는 잘하지 않는 것, 예전의 기억을 가진 세대에게는 알고 있으나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다시 실제로 경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거예요. 사실 이런 게 일상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소홀하기 쉽고, 그래서 공공 차원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성승환: 공간서가의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긴 호흡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여기에 놓여 있는 소품이나 공간적인 요소도 손이 많이 가게끔 만들고 있는데 그게 감정이라는 키워드랑 잘 맞는 구석이 있고요. 단순히 글을 쓰고 출력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한 땀 한 땀 책을 만들어 가는 과정의 특별함이 있죠
황선영: 필사를 위해 다양한 필기구가 마련되어 있어요. 여러 종류의 연필, 펜, 만년필 등이 각기 다른 경험을 주죠. 감촉도 다르고, 사각거리는 소리도 다르고요. 개인이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요소를 풍부하게 만들고자 했어요. 방문 후기를 통해 가끔 저희의 기획 의도를 알아채 주시는 분을 만날 때가 있는데, 뿌듯합니다.
오주연: 책을 만드는 워크숍 외에도 예술가와 협업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간단히 소개 부탁드려요.
성승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다양한 접점들을 만들고자 했어요.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 사운드 아트 등 장르의 구분 없이요. 전시 중인 김원진 작가의 미술 작업도 비대면 상황에 맞춰 작업 키트를 제작해서 제공하고, 온라인 워크숍을 통해 만든 개인의 작업을 모아서 재구성한 것이에요.
황선영: 자기감정을 알아챌 수 있어야 그게 예술적인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될 수 있어요. 예술가의 작업도 나의 이야기 또는 나의 지금 상태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되곤 하죠. 작가들에게 본인의 창작 과정에서 감정의 작동과 연관해서 작업할 수 있는 요소들을 제안했고, 그것을 함께 할 수 있는 작가들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요.
이재준: 재미있는 게 작가들도 감정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되게 많은 것 같아요. 이 공간 안에 작가들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그 작업 세계에 시민들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감정이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작가의 작업을 연장하는 결과물을 만들어요. 교육하려고 하기보다 감정이라는 키워드로 경험을 나누다 보니까 자연히 공감대가 형성되고, 그래서 작가들이나 참여자들의 만족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에요.

콜라주 아티스트 염지희 작가와 함께한 '감정 조각 모음' 워크숍의 결과물이 벽면 한편에 전시되어 있다. ⓒ김재희

'감정선', 김원진, 2021 / 200명의 시민이 비대면 워크숍을 통해 작업한 결과물을 김원진 작가가 재구성한 작품이다.
오주연: 개인의 감정을 바라보고, 표현하고, 쌓아두는 경험을 통해 공공의 공간이지만 개인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점이 특별한 것 같습니다.
팀장: 기존의 공공공간과는 다른 분위기를 제시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이곳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본인의 공간으로 애정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며 운영하고 있어요. 그런 마음이 잘 전달되면 좋겠어요.
이재준: 우리나라 사람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러요. 어렸을 때부터 감정을 마음에 담아 두어야지 표출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배우는 것 같아요. 사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연습이 필요해요. 우리도 이제 자기감정을 돌아볼 필요가 있고, 돌아볼 시대에 와 있다고 생각하고, 감정서가는 그 과정이에요. 여기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할 수 있지만, 저희는 그 경험을 강요하지 않고 그냥 앉아서 문장 하나를 쓰는 것만으로도 이 공간에서 충분히 자기 것을 만들 수 있어요. 그 점을 여기 오시는 분들이 편안하게 느끼고 그 편안함이 좋다는 감정을 가져가는 거죠. 그게 ‘여기에서 내가 감정을 표현했다’ 또는 ‘다른 감정들을 보고 읽고 경험했다’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거 아닐까요? 자신의 감정에 대한 표현은 점점 다채로워지고요.
그동안 공공의 의사결정은 수치에 의해서 진행돼 왔어요. 이제는 그보다 더 좋은 방향, 양적 증가보다는 질적 성장을 고민해야 할 시기가 아닐까요. 그게 공공의 역할이 되면 공공과 개인의 좋은 경험의 폭이 넓어지고, 공공에 대한 신뢰도 굉장히 높아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공간의 의외성이 그런 좋은 사례가 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홍보를 하나 하자면, 10월 1일 예술가와의 토크가 진행되는데 마침 SPACE 독자들도 관심을 가질 바래(BARE)가 출연합니다. 두 분이 감정에 관한 프로젝트를 하고 계신 게 있어요. 앞서 언급한 ‘공간의 사유화’ 이야기도 등장할 것 같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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