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배치의 상징 효과
6・25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지난 1951년 7월 10일, 개성 송악산 기슭의 내봉장에서 휴전 첫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공산군 측은 회담 공간을 전쟁 승리라는 선전으로 채우려 했다. 북위 38도선 바로 이남이면서 당시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서 휴전회담을 개최하였고, 유엔군 차량이 회담 장소에 들어갈 때 백기를 게양하도록 했다. 또한 좌석을 남향으로 배치한 후 유엔군 대표단에게 낮은 의자를 주어 유엔군 대표단을 항복사절단처럼 보이게 했다. 회담장 탁자 위에서는 쌍방이 그들의 깃발을 더 큰 것으로 바꾸려 하기도 했다. 이런 회의장 위치와 배치는 승전국과 패전국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합의를 어렵게 만들었다.
1951년 10월 휴전회담은 개성 대신에 파주 널문리 지역에 군용 천막을 치고 속개되었다. 공산군 측이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자는 주장을 철회하고 당시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자는 유엔군 측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회담 장소가 변경되었다. 이때 널문, 즉 판문(板門)이라는 원래 지명에 중국인민지원군이 이해할 수 있는, 상점이라는 뜻의 한자어 점(店)이 결합된 ‘판문점’이 등장했다. 이 한자어 지명의 세 글자가 각각 여덟 획이라 38선 이미지는 판문점이라는 이름에서도 존속했다. 판문점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총・포격이 금지되고 이동이 자유로운, ‘공동경비구역’으로 불렸다. 오랜 휴전회담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북측은 판문점에 목조건물을 건축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목조건물에서 정전협정이 서명되었다. (Image courtesy of National Archives of Korea)
기존 판문점 건물은 오늘날 북한이 평화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박물관 지붕에는 피카소의 비둘기 그림이 그려져있다.©Wbfergus at Wikipedia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판문점 목조건물에서 정전협정이 서명되었다. 정전협정에서 합의된 군사분계선 위치는 기존 판문점을 북측에 속한 지역으로 규정하였다. 정전협정 체결을 며칠 앞둔 7월 22일 군사정전위원회(이하 군정위) 준비회의에서 공산군 측은 자신들이 세운 기존 판문점 건물을 군정위 회의실로 사용하자고 주장했지만, 군정위 회의실을 정전협정의 군사분계선 위에 새로 설치하자는 유엔군 측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기존 판문점 건물은 오늘날 북한이 평화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박물관 지붕에 피카소의 비둘기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정전협정 서명 당시 건물 안에 전시되었다가 유엔군의 항의로 가려졌던 것이다. 박물관에는 미군장교 살해에 사용된 도끼도 전시되어 있다.
새 판문점 부지는 북한 공병 중좌가 제시했고, 미국 공병 중령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확정되었다. 군사분계선 북쪽으로 언덕이, 남쪽으로는 평지가 자리한 지세였다.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승전국이 산을 뒤로 등진 배산(背山)의 남향을, 패전국이 산을 앞으로 면한 임산(臨山)의 북향을 취했다는 점에서 새 판문점 위치는 북측에게 시계(視界) 및 사계(射界) 확보뿐 아니라 유리한 상징 효과를 제공했다.
새 부지에서 유엔군은 중립국감독위원회(이하 중감위) 회의실, 군정위 회의실, 공동일직장교 사무실 등 3개 동을 건축했는데 오늘날 임시 건물이라는 의미로 각각 T1, T2, T3로 부르고 있다. 공산군은 중감위 사무실 및 휴게실 그리고 중립국송환위원회(이하 중송위) 사무실 등 3개 동을 세웠다. 1954년 중송위가 해체되면서 중송위 사무실은 북측 경비병 휴게실이 되었다.
1961년 북측은 군사분계선 바로 북쪽 언덕에 큰 초소를 설치했다. 1964년에는 언덕 위 초소 옆에 ‘평화의 파고다’라는 휴게소를 세웠다. 1965년 남측은 자유의 집을 군사분계선 바로 남쪽에 올렸다. 1970년 북측은 언덕 위 파고다를 철거하고 판문각을 건축했다. 1990년대 후반 남측은 자유의 집을 높게 증축했다.
이런 높이 경쟁은 인근으로도 번졌다. 비무장지대 내 남측 대성동 마을에서 100m 높이의 태극기 게양대가 세워지자 북측 기정동 마을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기 게양대로 기네스북에 오른 160m 높이의 인공기 게양대가 등장했다. 모두 상대 위에 있으려는 경쟁이다.
공동경비구역의 분리 경비
공동경비구역 내 유엔군사령부(이하 유엔사)는 판문점 내 싸움이 벌어지면 상대에게서 떨어지도록 지침을 내리고 무기사용을 금지했다. 무기사용이 금지된 상황에서는 경비병 수의 우열이 싸움의 승패를 좌우한다. 판문점 내 싸움은 주로 상대의 감시초소를 밀착 봉쇄하고 상대가 허점을 보이면 다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바둑판 모양의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벌어지는 검은 돌과 흰 돌이 각각 몰려다니면서 상대 돌을 포위해서 따는 일종의 바둑게임이었다. 그러다 보니 공동경비구역 내 전략은 지역방어보다 대인방어였다.
공동경비구역은 지형적으로 남북 간 대칭이 아니었다. 특히 공동경비구역 경계선 일부는 군사분계선 일부와 겹쳤다. 판문점 회의실을 가로지르는 군사분계선은 서쪽으로 가다 작은 개천인 사천강을 만나면서 꺾여 강을 따라 지난다. 공산군은 북측 공동경비구역을 통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널문다리 또는 사천교)’를 통해 남측 공동경비구역으로 바로 들어올 수 있었지만, 유엔군은 남측 공동경비구역을 통하지 않고 북측 공동경비구역으로 바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1970년대 초 북한군은 공동경비구역 내 남측 구간에 초소를 4개나 건립했고, 차단기도 설치하여 유엔군 통행에 지장을 주었다. 유엔군 경비병이 북한군 경비병보다 적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1976년 9월 7~13일 쌍방은 군정위 공동감시소조의 감독하에 군사분계선 위치에 1m 높이의 콘크리트 기둥 59개를 10m 간격으로 세우고, 군사분계선 위 7개 건물의 주변에는 높이 5cm, 폭 50cm의 콘크리트
덩어리로 군사분계선을 표시했다. 유엔군이 회의실 건물에 짙은 하늘색을 칠한 것도 군사분계선 표시 이후의 일이다. 또 회의실 내에서도 회의실 탁자 가운데를 지나는 마이크 케이블이 군사분계선으로 기능했다. 북한 경비병이 공동경비구역 남측 지역에 출입할 수 없게 됨에 따라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폐쇄되었다. 북한군은 보급로 확보를 위해 북한 지역과 공동경비구역 북측 구역을 연결하는 다리를 3일 만에 건설했다. 그래서 그 다리는 ‘72시간다리’로 불린다.
이제 경비병들은 군사분계선을 넘을 수 없게 되었다. 한반도 비무장지대가 비무장지대가 아닌 것처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 더 이상 공동경비구역이 아니게 되었다. 물론 군정위 대표 및 참모, 민간인, 기자 등의 월경은 금지되지 않았으나 유엔군은 안전을 위해 넘지 못하도록 관리하고 있다.
사람뿐 아니라 심지어 국기도 분리되어 있다. 2002년 부시 미국대통령의 도라산역 방문 무렵 북한군 경비병이 군정위 회의실에 비치된 천 재질의 한국 및 미국 국기를 모독했는데, 이후 종이로 만든 유엔 참전국 국기들이 유리 액자에 담겨 전시되고 있다.
넘기 어려운 낮은 담 그리고 월담 효과
판문점 모습은 서울 근교에서도 볼 수 있다. 남양주종합촬영소(구 서울종합영화촬영소)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세트장이다. 실제 판문점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정치적 세트장이다.
1958년 말 중국군이 북한 철수를 완료하자 북한은 군정위 회의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줄곧 주장했고 판문점 회담은 정치선전장이 되었다. 그 무렵 유엔군 수석대표로 부임한 넌 미국 해군 소장은 군정위 회의실에 마이크를 장치하고 회의실 밖에 여러 확성기를 설치하여 연결하도록 조처했다. 1967년 유엔사는 군정위 회의실 유리창을 크게 만들어 바깥에서 회의실 안이 잘 보이도록 개조했다. 이런 건물 구조에서 양방향의 협상이나 합의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일방적으로 전개되는 퍼포먼스만 펼쳐졌다.
판문점의 상징 효과는 1976년 옥외 군사분계선 설치 이후 더 커졌다. 실제 공동경비구역이 아니게 된 시점부터 월경이라는 정치적 행위가 큰 상징 효과를 갖게 된 것이다. 1978년 6월 13일에는 스트립쇼로 불리는 퍼포먼스가 있었다. 남측 해상에서 구조된 8인의 북한 어부들이 판문점을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었는데, 북한군 소좌가 북한 어부들에게 뭔가를 지시하자 북한 어부들은 선물 보따리를 남쪽으로 던졌고 시계, 구두, 양복, 러닝셔츠 등도 벗어 던졌다. 북한 어부들이 북한군 장교에게 팬티도 벗느냐고 묻는 광경이 목격되기도 했다. 다음달인 7월 3일 북으로 송환된 4인의 북한 어부들 역시 옷을 벗어 던졌다. 1960년 9~10월 북으로 송환된 북한 어뢰정 승무원들도 옷을 벗어 던지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때는 군사분계선이 없던 시절이고 회의실 내에서라 퍼포먼스 효과는 약했다.
이외에도 군사분계선을 넘는 정치적 사건은 여럿 있었다. 가장 최근의 사건은 2018년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이다. 회담 직후인 2018년 5월 2~3일에 조사된 한국갤럽의 문재인 대통령 직무수행 지지율은 83%로 1주일 전보다 10%포인트나 올랐다. 남북한의 최고지도자가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 가고 오고 한 모습은 처음이었고 정치적 효과도 그만큼 컸다.
2018년 4월 정상회담을 계기로 판문점에 다리 하나가 유명해졌다. 바로 남측 중감위 국가인 스위스 및 스웨덴 대표단의 캠프와 중감위 회의실 사이의 늪지대 지름길인 도보다리다. 본래 다리의 폭을 넓히고 또 군사분계선 표식판 0101호까지 다리를 T자로 연장했다. 남북 정상이 도보다리 끝 군사분계선 표식판을 만지고 단독 회담을 가진 모습은 큰 상징 효과를 봤다.
무릇 정치는 동원으로 세력화되고, 정치적 동원은 감성으로 동력화되며, 원초적 감성은 보이는 것으로 증폭된다. 눈에 보이는 토목구조물이 정치적 상징 효과를 갖는 근거다. ‘빌 공’에 ‘사이 간’으로 구성된 공간이라는 말은 빈 사이를 뜻하는데, 판문점의 남북 사이는 낮은 군사분계선만이 있을 뿐이고, 군사분계선 위에 걸쳐진 군정위 회의실 등은 오늘날 본래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 빈 건물이다. 채우지 않고 비울수록 상징 효과는 더 클 수 있다.
시(時)와 공(空)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장소의 의미가 때에 따라 다르고, 또 때의 의미가 장소에 따라 다르다. 동일한 장소가 때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겠지만, 판문점이라는 장소는 냉전, 데탕트, 탈냉전, 세계화, 신냉전 등 여러 시대에 걸쳐 냉전적 현상을 일관되게 견지해왔다. 1970년대 데탕트의 기류는 한반도에 7・4공동성명과 같은 교류 가능성을 제고시켰지만, 남과 북 모두 국내 정치적 이유에 의해 폐쇄적 체제를 지향했고, 그리고 군사분계선이 표기되지 않은 공간에 세워진 판문점은 오히려 공동경비구역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분리경비구역으로 전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렇지만 시류가 판문점 공간의 모습을 결국 바꿀 수도 있다.
차단과 통행은 서로 반대된다기보다 보완적인 개념이다. 반드시 담이 높다고 해서 넘기 어렵고 또 담이 낮다고 넘기 쉬운 것은 아니다. 높이가 5cm밖에 되지 않는 판문점 군사분계선은 웬만한 높은 담보다 넘기 어렵다. 넘기 어려운 낮은 군사분계선을 넘는 행위는 그 자체가 하나의 감흥적인 퍼포먼스로 작동했다. 판문점 공간은 시류의 변화를 억제하기도 하고 또 감흥으로 변화를 주도하기도 하는 것이다. <진행 이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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