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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 SPACE] 김종성이라는 유산

글
박정현
진행
김정은 편집장
「SPACE」 216호(1985년 6월호) ▶ e-매거진보기​

 

 

‘모던’이 열망과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시절이 있었다. 먼저 출발한 것, 그래서 이미 도달했으리라 여기는 것을 향한 열망, 그러나 이 열망이 쉽게 충족될 수 없기에 열망의 크기에 비례해 불안이 생긴다. 이 두 정서는 상상 속 (또는 믿음 속) 근대의 근원과 자신이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멀리 있다는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모던은 시대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자격과 조건을 묻는 단어이기도 했다. 20세기 중반 한국의 건축가들은 저 멀리 있는 모더니즘의 중핵에 가닿기를 갈망했고, 피할 수 없는 물음에 대면해야 했다. “당신(의 건축)은 충분히 모던한가?”, “당신은 모던이 무엇인지 아는가?” 나아가 “당신은 모던을 믿는가?” 

이 질문에 확신을 가지고 답할 수 있었던 건축가는 드물었다. 김종성은 확고한 신념으로 모더니즘 건축을 말하고 실천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당대 한국 건축가 누구보다 근대건축의 중심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 이전 박춘명과 강병기가 단게 겐조의 도쿄대학교 연구실에서 공부했고, 김중업이 르 코르뷔지에 사무실에서 일했지만, 김종성이 제자, 사무실 스태프, 후배 교수로 미스 반 데어 로에와 맺었던 관계에 비할 수는 없다. 근대의 신화적 인물과 긴 시간을 함께하며 그 정수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김종성이 유일하다. 유학길에 올라 1956년 시카고 일리노이 공과대학교(IIT)에 입학한 이래, 미스의 사무실과 IIT학장으로 일한 뒤 1978년 귀국한 김종성은 근대건축의 화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기획기사 ‘모더니즘의 진화와 김종성’의 시작 페이지, 「SPACE」 216호, 90쪽.
 

 

근대를 향한 불안과 열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또는 모른 척해도 된다는) 목소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모여들던 1985년, 모더니즘을 다시 호출하는 일에 김종성보다 더 적합한 인물은 없었다. 「SPACE」 216호(1985년 6월호)는 ‘모더니즘의 진화와 김종성’을 연속 기획기사로 준비했다. 같은 해 3월호에서 ‘건축쟁이 엄덕문’을, 5월호에서 ‘박춘명과 합목적성의 건축’을 다룬 데 이은 세 번째 ‘한국현대건축가론’이었다. 특집은 양윤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와 김종성의 대담, 양윤재의 대담 후기 ‘비합리 속의 합리주의’, 건축가 손두호의 에세이 ‘가까이서 본 김종성 교수’로 꾸려졌다. 대담은 김종성이 미스에게 배우기 위해 IIT를 선택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1985년 당시까지의 주요 작업에 얽힌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후 여러 언론 인터뷰, 『김종성 구술집』(2018)에서 반복되는 이 서사는 한국 현대건축의 신화로 자리 잡았다. 

 

 

 

 

 

 

「SPACE」 216호, 94~97쪽.

 

 

양윤재는 대담 후기에서 김종성의 귀국(1978년)과 이후 활동이 한국 현대건축의 ‘새로운 국면’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1 그는 놀랍게도 프랑스혁명기 전후와 5.16혁명 전후를 비교하는데, 프랑스혁명 직후 상징주의 건축이 요구되었듯 5.16 직후에는 상징적이고 심미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프로젝트명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한국성을 강조한 1960~1970년대 대형 국가 프로젝트를 르두, 르퀘 등의 혁명기 프랑스 건축과 유사하게 여기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말하는 건축’(architecture parlante)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런 경향에 반해 건축 자체의 합리성에 주목하는 김종성의 건축은 듀랑의 합리주의와 닮았다는 것이 양윤재의 진단이다. “건축에 있어서의 미적 가치는 합리적인 구조와 기능 속에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고 여긴 듀랑의 건축관은 “페레와 미스 반 데어 로에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2 건축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시대가 저물고 합리적인 구조와 기능을 추구하는 시대가 오기를 기대하는 양윤재는 김종성이 이 새로운 흐름을 주도할 수 있다고 보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변화를 한국 건축이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실제로 박춘명, 이희태, 김중업, 김수근 등 1960~1970년대 국가 프로젝트를 수행한 건축가들은 모두 일본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건축가였다. 이 흐름이 미국 유학파의 귀국과 함께 재편되기 시작했는데, 김종성이 그 선두에 있다는 진단이었다. 김종성이 언제나 ‘교수’로 불리는 이유와 탁월한 디테일 이해, 비례와 균형에 대한 남다른 감각 등을 에피소드를 통해 전하는 손두호의 글은 김종성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기다.

 

 

 

 

 

 

 

「SPACE」 216호, 98~99, 91~92쪽.

양윤재와 손두호 모두 김종성이 주요 프로젝트에 효율적으로 시간을 할애해 훌륭한 작품을 계속 생산하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1980년대 중반 이미 서울건축은 직원 수백여 명이 훌쩍 넘는 대형 설계사무소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김종성과 그의 건축에 관한 여러 글이 대부분 언급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물어야 한다.▼3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중반에 걸쳐 본격적으로 규모를 불려 형성된 대형 설계사무소, 이들의 프로젝트를 역사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경제의 자본축적, 재벌의 계열사 확장, 국가가 주도한 기념비적 건물에서 기업의 대형 건설사업으로의 재편, 대기업 계열사나 다름없는 설계사무소의 등장 등의 배경을 함께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김종성이 IIT 학장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계기이자 그가 남긴 작품 중 손에 꼽을 만한 완성도를 지닌 힐튼호텔을 철거하고 재개발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요즘, 김종성과 그의 유산에 대한 평가는 개인에서 사회로 문맥을 넓힐 필요가 있다.

 

양윤재가 ‘상징주의’라고 칭한 1960~1970년대의 건물은 일종의 ‘정체성’ 프로젝트였다. 건축은 타자와 다른 한 개별 국가의 고유한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설령 그것이 상상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를 위한 수단은 형태를 빚기 쉬운 철근콘크리트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와 아메리카, 유럽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콘크리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 공동체의 정체성을 표현했다. 이들 중 일부를 우리는 브루탈리즘이나 사회주의 모더니즘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근대가 강요한 보편적 양상이다. 

 

 

 

 

 

 

「SPACE」 216호, 100~103쪽.

 

미스의 건축 역시 보편성을 지향한다. 엄정한 비례와 모듈 체계는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장치이자 표준화된 공업생산과 보조를 맞춘다.▼4 장소와 프로그램을 초월하는 체계다. 오피스와 아파트, 호텔과 미술관 같은 프로그램, 지역과 장소에 조율되긴 하지만, 미스식 공간은 그 자체의 논리에 따라 전개된다. 누가 미스의 건물을 두고 장소성을 묻겠는가? 이 건축적 보편성은 현대 세계, 더 정확히는 자본주의 체제의 보편성을 전제한다. 철골과 커튼월 생산 시스템이 없는 곳에서 미스의 공간은 펼쳐질 수 없다. 미스의 건축이 획일적이고 익명적이라면 제2차 세계대전 후 미스의 작업이 미국에 국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스식 건축의 획일성과 익명성은 자본의 보편성과 떼어서 설명하기 힘들다. 김종성 역시 1970년대 중반 동성빌딩과 효성빌딩을 설계하면서 커튼월 대량생산 기반이 없는 한국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없었는지를 파악해야 했다고 회고한다.▼5 대기업이 자사의 건설 작업을 도맡아 하는 설계사무소를 건립하기 시작한 시점이 한국 경제의 중공업화 이후인 1970년대 말이었던 점 역시 우연이 아니다.▼6 

전후 미스의 모더니즘은 기업 모더니즘(corporate modernism)의 전형이다. 이런 평가를 김종성과 서울건축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1978년 귀국과 서울건축 설립 이후 김종성의 손을 거친 프로젝트의 수는 1,000개를 넘는다.▼7 이 많은 작업은 한국의 기업 모더니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질문은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김종성의 유산을 어디까지 확대해 평가해야 할까? 그가 애정과 관심을 기울인 작업만 김종성의 것이고, 나머지 대다수는 서울건축의 것일까?

이 물음은 개인 건축가의 개별성과 대형 조직의 익명성이라는 오래된 이슈를 새롭게 제기한다. 보통 둘 사이의 충돌은 개인의 이름을 조직 안에서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에 집중된다. 예컨대, 국립중앙박물관의 설계자 박승홍이 맡은 역할의 고유성은 정림건축 안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반면, 김종성의 이름은 서울건축과 충돌하지 않는다. 김종성과 서울건축의 관계가 예외적이라면 이 조직 유형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소수의 탁월한 작품과 수없이 많은 범작이 각각 김종성과 서울건축에 대응하는 것으로 간단히 여길 수 있을까? 개인 건축가와 조직의 관계는 대형 사무실이 창업자의 퇴장 이후에 지속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김종성 이후의 서울건축에서 김종성의 유산은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가? 어느 것 하나 쉽게 답하기 어렵지만, 기존의 신화적 서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대면해야 한다. 비평과 역사의 과제가 무겁다. (글 박정현 / 진행 김정은 편집장)​

 

다음 호에는 서재원이 「SPACE」 41호 (1970년 4월호)에 게재된 유걸의 강씨 댁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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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윤재, ‘비합리 속의 합리주의’, 「SPACE」 216호(1985년 6월호), 102쪽.

2 위의 글, 103쪽.

3 37년이 지난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와 아카이브, 작가론과 구술집 발간 등으로 김종성 개인에 대한 자료는 대단히 충실하게 구축되어 있다. 건축가 김종성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은 동시대 어느 건축가보다 풍부하다.

4 정인하는 미스의 모듈은 질서를 부여하고, 효율을 극대화하는 표준 공업생산과 연관되며, 고유한 기계 미학을 낳는 것으로 설명한다. 정인하, 『구축적 논리와 공간적 상상력』,스페이스타임, 2003, 98~99쪽.

5 양윤재와 김종성의 대담, 「SPACE」 216호, 96쪽. 

6 삼우건축(삼성)은 1976년, 서울건축의 전신인 동우건축(대우)은 1977년, 창조건축(럭키금성)은 1984년에 각각 설립된다.

7 정인하, 앞의 책, 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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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현
박정현은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를 비롯해, 『전환기의 한국건축과 4.3그룹』(이하 공저), 『아키토피아의 실험』, 『중산층 시대의 디자인 문화』 등을 썼다.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 『건축의 고전적 언어』 등을 우리말로 옮겼고, 2018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스테이트 아방가르드의 유령>을 비롯해 <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등의 전시 기획에 참여했다. 현재 도서출판 마티의 편집장으로 일하며 건축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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