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 56호(1971년 7월호) ▶ e-매거진
「SPACE」 56호 13쪽.
지붕과 형태의 기괴함이 첫눈에 들어오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집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지붕의 조형의지(이상)와 평면의 기능(현실)이 타협을 시도한 결정적 피겨(figure)이기 때문이다. 건축가는 앞서 언급했듯이 지붕의 유기적 조형에 굉장히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동시에, 그렇다고 방들이 찌그러진 평면을 그리기는 스스로 용납하기 힘들었던 듯하다. 결국 그 양가감정의 응어리는 구겨진 계단으로 나타나는데 계단을 오르듯 한 단 한 단 살펴보면 건축가가 얼마나 계단을 고심하여 그렸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첫째 단은 방들의 직교 그리드를 따르며 다소 널찍하게 시작된다. 테라스의 폭과 거의 같은 것을 보면 1.2m는 족히 돼 보인다. 보통 계단의 첫째 단이 그렇듯 수직동선의 시작이면서도 거실 일부로서의 단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계단의 폭이 공간의 크기에 비해 유난히 넓고 측면이 열려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둘째 단은 평면의 직교 그리드와 지붕 기하학의 사선이 가볍게 만나는 지점으로 지붕 선을 따라 우측으로 길게 연장된 단은 벽난로의 선반인 듯 시치미를 뗀다. 아직 본격적인 ‘계단’이라 불러주기엔 망설여진다. 이윽고 셋째 단부터는 계단이라 부를 만치 순수한 수직동선이 되는데 첫째, 둘째 단에 비해서 폭이 현저히 줄어들 뿐만 아니라 지붕을 받치기 위한 좌측의 ㄱ자 내력벽으로 인해 일부가 막히면서 다시금 계단의 순수한 기능이 부정된다. 아마도 ㄱ자 내력벽을 옮기거나 없애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계단을 피해 마당 쪽으로 이동하는 순간 지붕과 맞닿은 각 실의 모서리를 모두 재조정해야 했을 것이며 또한 덩어리 감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아직 계단은 방의 직교 그리드를 따르고 있다. 급기야 넷째 단에서 지붕 사선과 방의 직선이 하나로 화합한 육각형의 디딤판이 나타나고 이를 시작으로 오롯이 ‘계단’이 되는데 때마침 굴뚝 벽체도 같이 생겨남으로써 그 유효 폭은 결국 70cm가 채 안되 보인다. 여기서도 굴뚝의 위치 조정은 어려웠을 듯한데 굴뚝을 거실 안쪽으로 약간이라도 이동하는 순간 거실 면적, 보이드의 모양, 지하 보일러실 벽체, 현관과의 유기적 관계가 모두 깨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 계단은 유유히 흘러 1층 지붕을 뚫고 올라가 내적 조형원리에서 유일하게 벗어난다. 주어진 상황을 제외하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함입한(involution) 바나 벤추리 하우스(Vanna Venturi House, 1964)의 계단이 연상되는 지점이다. 마찬가지로 OH씨 댁의 계단 또한 복합적으로 주름 지워진(com-pli-cated) 건축가의 내면 그 자체인 것이다.

연희동 OH씨 댁을 설계한 이는 건축가 공일곤이다. 그는 1937년에 평안도 벽동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월남하였고 서울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학교 건축과를 1960년에 졸업하였다. 1961년부터 9년간 김수근 건축연구소에서 자유센터, 정동 문화방송 등의 굵직한 프로젝트를 담당한 후 1969년에 자신만의 사무실을 개소한다. 그 후 공일곤은 OH씨 댁을 포함하여 K씨 댁(「SPACE」 40호), C씨 댁(「SPACE」 44호), 음악가 J씨 댁(「SPACE」 104호) 등 정통의(orthodox) 짜임새 있는 개인 주택은 물론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을 수행하면서 1989년에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도서관으로 제1회 한국건축가협회 특별상을 수상한다. 김수근과는 6살 차이에 윤승중과는 동갑내기로 안영배(1933년생), 김병현(1937년생), 유걸(1940년생), 김원(1943년생) 등과 같이 목구회(木口會)▼1를 창립한 한국 현대건축사에 중요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필자를 포함한 우리 세대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작품집은 고사하고 공일곤에 대한 정보는 극히 드물었다. 그중 「SPACE」 93호(1975년 2월호)에 실린 소고, ‘자작품을 통한 건축관, 유기체와 향수’는 그가 처한 작가로서의 복잡한 심경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유기체처럼 ‘완전한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망과 세상의 변화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자신 사이에 있는 스스로를 인정하고 겸허히 고뇌하는 자아성찰적 태도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그는 유행의 추구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20년 전 넥타이를 한결같이 매고 다니는, “작품에는 천재이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무신경”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김수근의 말대로 그는 건축가이기보다는 예술가였으며, 예술가이기 이전에 철학적 존재였던 것이다.
“나는 시골의 촌부로 있으면서 부엉이가 드나드는 집을 지을 꿈이나 꾸면서 살 것을 공연히 거대한 기계 같은 도시에서 하나의 부속품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가 생각해도 한심하기만 하다.”▼2
이렇게 자책했던 건축가를 생각하면 태생적으로 인간, 그리고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유할 수밖에 없는 건축가의 숙명과 역할을 오늘날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OH씨 댁 계단과 바나 벤추리 하우스의 계단. 1:30 모형(제작: 박순민) ⓒSuh Jaewon
햇빛이 청명한 5월 어느 날 필자는 어렵게 주소를 찾아내어 OH씨 댁에 직접 가보았다.▼3 50년 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주변의 볼품없는 건물들에 빽빽이 둘러싸여 있으나 그 존재감은 건축가를 대변하듯 당당하였다. 굴뚝이 조금 잘려나가고 담벽이 드라이비트로 새로 덮인 것 이외엔 크게 변형된 것 없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고, 마치 세상에 관심 없다는 듯이 안마당과 외벽은 온통 초록으로 무성하였다. 옆집에 물어보니 아직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한다. 설레는 마음에 시급히 한국 현대건축사를 위해 아카이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공일곤 건축가가 달가워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필자의 알량한 마음을 접어두었다. (글 서재원 / 진행 김정은 편집장)
(왼쪽) 계단에서 내려다본 모습(렌더링: 최장민) ⓒSuh Jaewon / (오른쪽) 차고에서 진입하는 부분(렌더링: 최장민) ⓒSuh Jaewon
현황 사진 ⓒSuh Jaewon
다음 호에는 신정훈이 「SPACE」 32호(1969년 7월호)에 게재된 이우환의 ‘일본 현대미술의 동향: 현대 일본 미술전을 중심으로’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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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구회(木口會)는 1965년에 창립된 건축가 모임의 이름이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과 선후배들이 매달 첫째 목요일에 모임을 열어 건축 얘기로 불꽃을 튀기며 밥과 말을 나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년 뒤 홍익대학교의 금우회, 한양대학교의 한길회 등이 출범하며 한국 건축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는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2 “건축가 공일곤씨(이세기의 인물탐구:17)”, 「서울신문」 1993년 2월 23일.
3 OH씨 댁의 주소는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1-33(모래내로 382-10)으로 ‘서비스 야드’가 실내로 막힌 것 이외에는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카카오의 3D지도나 에스맵(S-Map)을 통해 3차원 모형도 온라인에서 확인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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