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3년 3월호 (통권 664호)
모든 공간 언어는 항상 상대적이다
정수진의 일관된 건축 어휘나 태도에 대해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접한 중평 몇 가지는 이러하다. 그가 설계한 주택은 외적으로는 성채를 방불케 할 만큼 폐쇄적이고 미니멀하다. 반면 중정을 품은 꽉 짜인 내부는 다채로우며 정밀한 시공으로 완성된다는 거다. 판교신도시의 단독주택지가 형성될 무렵, 정수진이 제시한 중정형 주택은 외부와의 소통을 거부하며 공공성이 부재한 게 아니냐는 논란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판교 외 지역이나 단독주택 외 용도에서도 프라이버시를 위해 폐쇄적인 입면을 구성하고, 내적으로는 하늘을 비롯한 다양한 장면을 담으려는 노력은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그가 하는 건축의 변별력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지금 우리는 건축가 정수진의 주택에서 무엇을 봐야 할까? 풍요로운 내부를 만들기 위해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정수진의 집요함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면, 그가 보여주려는 달의 풍경은 무엇일까?
이번 「SPACE(공간)」 3월호 프레임에서는 신도시 판교의 ‘동굴집’, 오래됐지만 빠르게 변해가는 성수동의 근린생활시설 겸 주택 ‘윤슬하다’, 그리고 순천의 전원주택 단지에 여유롭게 자리 잡은 ‘자연’, 이렇게 각기 다른 조건에 놓인 세 주택을 살펴봤다. 정수진은 하늘집(2011)을 비롯해 노란돌집(2012), 붉은 벽돌집(2013), 이-집(2015), 빅-마마(2017) 등 판교에 여러 채의 주택을 설계했고, 용인의 별-반(2017)이나 순천의 비둘기집(2017) 등 여러 지역에서 주로 주택을 작업해왔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프레임이 그가 설계한 주택들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기회였다.
“흔히 집이란 먹고, 자고, 가족들과 생활하는 게 기능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거기에 하나를 더해주고 싶어요. 늘 변화한다는 느낌. 시간의 흐름과 사람의 감정에 따라 공간이 변화할 수 있는 변화감이랄까요.” 정수진은 내향적인 중정형 주택을 만들어내는 자신의 건축 어휘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어휘들은 각 대지의 조건과 만나 각자의 변화감을 만들어낸다.
그는 루이스 바라간의 건축을 좋아한다고 했다. “바라간의 건축에서는 건물이 보이지 않아요. 주택의 외관이 분명하게 인지되지도 않고, 내부에 들어가도 공간이 보이지 어떤 조형이 보이지는 않아요. 바라간 건축에 강렬한 색이 쓰이는데 그 색을 공간으로 녹여서 감동을 만드는 게 빛인 거 같아요. 건축 어휘는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죠. 그런데 이동하면서 끊임없는 장면이 나타나고, 그것이 감동을 주죠. 어찌 보면 제가 제일 추구하고 싶은 건축이에요.” 한정된 대지 안에서 끊임없는 변화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그는 치수에 집착하고, 이는 거주하는 이가 시계 하나 더할 자리를 찾기 힘든 긴장감 있는 공간구성으로 나타난다.
답사 당시의 일이다. 동굴집의 숨겨진 현관 앞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모든 공간 언어는 항상 상대적”이라는 정수진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현관문과 평행하게 좁고 긴 유리창이 나 있는데, 그 창 안쪽으로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안주인이 보였다. 이미 빈틈없는 성벽 같은 외벽을 지나왔기 때문인지 그 의외의 작은 열림이 과감하게 다가오며 집 안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렸다. 이런 지점이 그저 ‘폐쇄적’, ‘내향적’이라고 일반화하기 어려운 공간의 소통 방식이 아닐까.
정수진의 주택은 ‘정겨운 동네’라는 신화가 의미하는 공공성의 실체에 대한 문제 제기일 수도, 지금 이 도시의 삶에 대한 해석일 수도 있겠다. 이분법에는 출구가 없기 마련이지 않은가.
편집장 김정은
「SPACE(공간)」 2023년 3월호 (통권 664호) 목차
006 EDITORIAL
010 NEWS
028 PROJECT
EDGE 쥐트크로이츠 베를린 ‐ 초반 보스 아키텍텐
EDGE Suedkreuz Berlin ‒ TCHOBAN VOSS Architekten
038 PROJECT
데 보르타위넨 ‐ 엘리펀트
De Voortuinen ‒ Elephant
046 PROJECT
우리학교 출판사 ‐ 건축사사무소 루연
Woorischool Publishing Office ‒ Luyoun Architects
054 PROJECT
신용보증기금 춘천지점 리모델링 ‐ 건축사사무소 오막
Chuncheon Branch Office of Korea Credit Guarantee Fund Remodeling ‒ OMAK Architects
064 PROJECT
송파위례유치원 ‐ 조항만
Songpa Wirye Kindergarten ‒ Zo Hangman
072 FRAME
내적인 풍요로움: 에스아이 건축사사무소
Inner Affluence: SIE:Architecture
074 FRAME: INTERVIEW
다채로운 일상 공간_ 정수진 × 김정은, 박지윤
Colourful Daily Spaces_ Jung Sujin × Kim Jeoungeun, Park Jiyoun
080 FRAME: PROJECT
동굴집
Cave House
088 FRAME: PROJECT
윤슬하다
Yoonseul Building
096 FRAME: PROJECT
자연
Nature
102 FRAME: CRITIQUE
건축의 본원과 정수진의 건축_ 이상해
Nature of Architecture and Architecture of Jung Sujin_ Lee Sanghae
106 LIFE
현실의 창조적 재구성: 〈2022 타이틀 매치: 임흥순 vs. 오메르 파스트 《컷!》〉_ 방유경
Creative Transfiguration of Reality: ‘2022 Title Match: IM Heung-soon vs. Omer Fast «Cut!»’_ Bang Yukyung
112 LIFE
참조로부터 경로를 더듬는: 카펫뉴스_ 조준우, 송승엽, 조유환 × 윤예림
Seeking a Path via References: CARPET NEWS_ Cho Joonwoo, Song Seungyeop, Cho Youhwan × Youn Yaelim
120 REPORT
애벌레와 건축이 만나면: 분해농장_계단_ 이용주 × 한가람
When Worms Meet Architecture: Decomposition Farm_Stairway_ Yong Ju Lee × Han Garam
126 RELAY INTERVIEW: I AM AN ARCHITECT
꿈결에 길을 내는_ 이병엽 × 윤예림
Carving Out a Path to Dreams_ Lee Byungyeob × Youn Yaelim
▲ SPACE, 스페이스, 공간
ⓒ VMSPAC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