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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공간)」2023년 4월호 (통권 665호)
가상공간과 건축, 공공성에 대하여: 〈스페이스 파퓰러: 서치 히스토리〉
로마 국립 21세기 미술관(Museo nazionale arti del XXI secolo, 이하 MAXXI)에서는 MAXXI 아키텍처 컬렉션에 소장된 근대건축가의 작품을 현대의 언어로 재해석하고자 ‘알칸타라 – MAXXI 프로젝트/스튜디오 비지트’(이하 스튜디오 비지트) 전시 시리즈를 선보여왔다. 이탈리아의 섬유 브랜드 알칸타라와의 협업으로 기획된 전시는 2018년부터 매해 현 시대 디자이너를 초대해 20세기의 건축, 그리고 알칸타라 소재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2022년 12월 7일부터 2023년 1월 15일, 그 다섯 번째 전시 〈스페이스 파퓰러: 서치 히스토리〉가 열렸다. 스페이스 파퓰러는 이탈리아 건축가 알도 로시의 도시 개념을 재료 삼아 그들이 상상하고 정의하는 가상현실의 경험을 표현했다.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에서 이들이 짓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스페이스 파퓰러의 공동대표 라라 레스메스, 프레드리크 헬베리의 대답에서 가상현실을 구축하는 건축가의 책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인터뷰 라라 레스메스, 프레드리크 헬베리 스페이스 파퓰러 공동대표 × 윤예림 기자
윤예림(윤): 스튜디오 비지트에 초대된 작가는 MAXXI 아키텍처 컬렉션 가운데 어떤 건축가를 재해석해 선보일지 선택한다. 알도 로시를 선택한 이유와 전시의 기획 배경에 대해 들려 달라.
라라 레스메스, 프레드리크 헬베리(레스메스, 헬베리): 스페이스 파퓰러는 가상현실의 도시에 대한 연구를 오래전부터 수행해왔고, 알도 로시의 도시 개념에 일찍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는 도시에 관한 알도 로시의 초기 글들을 읽었다. 그는 도시의 실제 모습보다 우리가 도시를 경험하는 방식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도시를 위에서 내려다볼 때 보이는 시가지의 패턴은 실제 우리가 경험하는 도시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도시를 하늘이 아니라 거리의 눈높이에서 감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로시는 도시와 건축을 시간의 흐름과 상생하는 관계로 바라본다. 이러한 로시의 관점을 현대 도시에 적용해보고자 했다. 과거와 달리 현대 도시에서는 실시간 위성 지도를 통해 시시각각 변하는 우리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다. 게다가 가상 도시에서는 우리의 모든 이동 경로가 기록으로 남는다. 이러한 ‘검색 기록’의 형성 과정이 로시의 도시 개념과 연결된다고 생각해 〈스페이스 파퓰러: 서치 히스토리〉(이하 〈서치 히스토리〉)를 구상하게 됐다.
윤: 〈서치 히스토리〉가 시각, 청각, 촉각을 동원해 경험하는 전시로 기획된 이유를 알겠다. 전시는 움직이는 원형의 구조물 안으로 관람자를 초대한다.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장면과 소리를 직접 체험하지 못해 아쉽다. 어떤 경험인지 묘사해 줄 수 있나?
레스메스, 헬베리: 전시장 중앙에 위치한 원형 구조물은 두 개의 환경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출발점인 ‘환경A’이고, 또 하나는 목적지인 ‘환경B’다. 환경A와 B는 몰입형 미디어 세계로 관람자를 안내하는 포털을 의미한다. 먼저 커튼을 열듯 구조물 내부로 입장하면, 환경A가 형형색색의 파사드로 구성된 도시의 경관을 천에 인쇄된 형태로 보여준다. 그곳에서 문턱을 넘어서면 환경A와 B 사이에 존재하는 통로를 지나게 된다. 이곳은 일종의 버퍼 구간으로, 새로운 환경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한 정보가 담겨 있다. 통로를 지나면 마침내 목적지인 환경B에 다다른다. 회전하는 천들은 열 개의 레이어로 겹쳐져 있는데, 각 레이어마다 서로 다른 소리로 반응하는 사운드스케이프를 디자인했다. 이는 실제로 로마를 오가며 직접 녹음한 소리로 만들어낸 도시의 불협화음이며 스페인의 음악 듀오인 산 헤로니모와 협력해 제작했다. 구조물 외에도 전시장 벽에는 MAXXI가 소장한 알도 로시의 작품들, 그리고 우리가 기존에 지속해온 가상현실에 관한 연구 및 프로젝트들의 내용이 함께 전시됐다.
윤: 그러한 전시의 경험이 가상현실에서 공간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경험과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레스메스, 헬베리: 전시에서 선보인 원형 구조물은 가상현실의 경험을 현실에 만들고자 한 아이디어를 형상화한 것이다. 가상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감각은 촉감이며, 천은 포털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소재라고 생각한다. 천을 열고 작품 내로 들어서는 행위는 마치 세상의 문을 열고 통과해 새로운 환경으로 들어서는 경험과 같다. 구조물 안에서는 도시의 다양한 요소들이 겹쳐지며 형성하는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이를 여러 겹의 천으로 표현한 것은 가상의 환경이 다양한 목적과 여러 스케일로 경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알칸타라 천은 CNC 절단이나 레이저 절단 등의 작업이 모두 가능한 유연한 소재로 우리가 의도하는 전시 공간을 표현하기에 적합했다. 또한 실제 사진에 가까운 퀄리티로 이미지가 인쇄돼 작품이 비현실적으로, 또 초현실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었다. 이는 관객이 천에 실제로 접근하고 접촉했을 때의 감각을 예상할 수 없게 한다.
윤: 가상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감각을 촉각이라 한 이유가 궁금하다. 가상현실의 경험을 현실, 즉 신체 감각으로 끌어와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레스메스, 헬베리: 어떠한 형태의 몰입형 기술을 사용해 가상현실에 매몰되어 있어도, 우리는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한다. 신체는 항상 물리적 공간에 존재하며 그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디지털 환경에 접속하는 가장 일반적인 수단은 컴퓨터 화면이나 스마트폰 등의 기기다. 이것들은 신체나 물리적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21세기의 중반 즈음에 이르면 모든 미디어가 공간적인 특성을 갖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즉 스마트폰, 노트북, 컴퓨터 화면은 차츰 사라지고 우리 몸에 착용하는 것들로 대체되어, 신체가 가상공간을 경험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이는 신체가 가상공간으로 둘러싸이게 될 미래를 대비해야 함을 의미한다. 〈서치 히스토리〉를 기획하면서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어떤 기기나 화면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다.
윤: 그도 그럴 것이 가상현실은 기술이 전할수록 더욱 가상의 ‘공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치 히스토리〉 이전 스페이스 파퓰러의 가상현실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변화해왔나?
레스메스, 헬베리: 오늘날 가상현실은 디지털 영역에 국한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우리의 연구는 디지털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회화부터 교회의 프레스코화, 책까지 모든 차원의 평면이 가상현실이자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연구와 작업을 지속해왔다. 이러한 관점은 회복의 구름(The Cloud of Resilience, 2013)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디지털 영역으로 확장됐다. 세계 사망률 데이터 베이스를 위한 플랫폼인 회복의 구름에서, 사람들은 가상으로 장례를 치르고 애도하는 행위를 했다. 이후에는 전시 〈밸류 인더 츄얼〉(2018)이나 〈프리스타일〉(2020) 등과 같이 미래의 가상 환경에 대한 추측을 기반으로, 공간이나 미디어의 새로운 잠재력과 관계를 연구한 작업이 주를 이뤘다. 그러다 팬데믹이 닥친 이후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가상공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2020년 10월에는 수백 명이 참여하는 건축 축제이자 컨퍼런스인 ‘아르키아/프록시마’(「SPACE(공간)」 645호 참고)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로 가상공간에서 진행하게 됐을 때 이를 위한 공간과 아바타를 디자인했다. 다시 말해 미래를 상상하고 추측하던 작업으로 시작해, 여전히 상상과 추측을 기반으로 가상의 공간을 구축해나가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축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깨닫고 있다.
〈프리스타일〉(2020) 전시 전경 / ⓒFrancis Ware
〈서치 히스토리〉 가상공간 이미지 / ⓒSpace Popular
윤: 어떤 것들을 깨달았는지 이야기해달라. 가상공간을 디자인하는 일은 현실의 건축과 같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 건축가를 필요로 지 않거나 새로운 자질을 요구할 것 같은데.
레스메스, 헬베리: 가상공간의 디자인에 건축가의 능력이 꼭 요구되지는 않을 것이다. 공간디자인 분야의 진입 장벽이 이전에 비해 낮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가상공간을 구축하기 위한 도구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건축가의 역할이 필요한 이유는, 건축의 역사와 문화가 도시의 좋은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건축은 사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공공의 성격을 가지며 시민을 위해 발전해왔다. 좋은 건축은 주변 환경을 고려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며 공간을 향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런 건축의 공공성은 가상공간에서 건축이 기여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윤: 전 세계적으로, 메타버스 산업은 근 몇 년간 크게 성장해 우리 일상에 빠르게 스며들었다. 팬데믹을 비롯한 여러 상황과 기술의 발전이 뒷받침한 결과다. 10여 년 전부터 이미 가상현실과 공간의 탐구를 지속해왔는데 현시점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레스메스, 헬베리: 몰입형 가상현실의 발전 덕에 우리는 3차원적으로 가상현실을 경험할 수 있게 됐다. 한 가지 짚고 싶은 점이 있는데, 우린 가상현실을 이야기할 때 ‘메타버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메타버스는 주변의 모든 환경과 분리된 하나의 상품으로서 많은 문제를 함축하는 용어라고 생각한다. 이상적인 공간의 가치와 비전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그대로 데려간 공간인 것이다. 이에 반해 몰입형 가상현실은 공동체와 새로운 교류, 문화 활동과 정체성의 확립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가령 VR챗 등의 몰입형 가상현실에서는 비록 아직은 미미하지만 현실에서 물리적 한계나 문화적인 이유로 찾아보기 힘든 공동체와 의미 있는 교류들이 가상 아바타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풍경을 목격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가상공간의 대부분은 사기업의 자산이며 이윤추구가 주된 목적이다. 그러나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향유하며 그곳에 있는 것들에 보다 많은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다면, 이를 기업의 자산이 아닌 공공 인프라의 일환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럴 때, 가상공간의 공공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에 건축과 건축가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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