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 이미지 ‘컨스트럭트 1102_7587’, 피그먼트 프린트, 150×200cm, 2017
「SPACE(공간)」2023년 4월호 (통권 665호)
사진작가 정지현이 도시 공간을 기록하게 된 배경에는 1983년생인 그가 ‘아파트 키드’로서 겪은 상실의 경험이 있다. 어린 시절을 비롯한 삶의 많은 기억을 떠올릴 때 소환되는 공간인 잠실 일대의 아파트 단지가 단번에 사라지는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이후 재개발 구역의 철거 현장을 누비던 작가는 신축 현장으로 반경을 넓히더니 이제는 건축의 물질, 표면, 자재, 구조를 이리저리 만지며 건축의 곁을 맴돈다. 터파기, 인장 강도, 커튼월 등의 용어를 자연스럽게 말하면서도 건축의 생경한 감각을 전하는 정지현, 그는 누구일까.

‘리컨스트럭트 301_4545’, 피그먼트 프린, 180x135cm, 2020
인터뷰 정지현 작가 × 윤예림 기자
윤예림(윤): 도시를 기록하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가보면 1세대 아파트의 외형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작업에서 출발했다.
정지현(정): 2005년 즈음 서울시가 뉴타운 사업을 추진하면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1세대 아파트들이 무분별하게 철거됐다. 당시 몇몇 예술가 집단은 철거 현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하는 등 거센 반대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는 내게도 정말 중요한 사건이었다. 사진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아파트들을 왜곡 없이 기록해보기로 했다. 꼭 영정 사진을 찍는다는 마음으로 말이다.
윤: ‘철거현장’(2013), ‘재건축현장’(2015) 연작에서는 렌즈 저편의 관찰자에서 아파트 담장 안팎을 종횡하는 개입자로 역할을 확장했다. 빨간색 페인트 통을 들고 비어 있는 아파트에 잠입해 빨간 방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정: 그저 빨간 벽의 시각적 연출이 목적이었다면 하룻밤 촬영 후 포토샵으로 색을 넣으면 되니 쉬운 일이다. 지만 한 장의 사진보다 중요한 건 그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현장에서는 여러 주체를 설득하고, 협의를 얻고, 유대를 쌓고, 서로를 이해해가는 일이 이루어진다. 특히 ‘재건축현장’ 시리즈는 그 과정이 작품화된 경우다. 당시 촬영 허가를 얻기 위해 재건축조합에 들어갔고, 조합원들의 관계를 가까이서 지켜보게 됐다. 그간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지내오던 이들이 집의 철거를 앞두고서야 단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반영해 ‘재건축현장’에서는 개별 방이 아닌 한층의 안쪽 벽면 전부에 빨간색 페인트를 칠했다. 철거 전 빨간 벽은 각 세대의 개별적인 공간으로 분절돼 보이다가, 점차 앞쪽의 벽들이 헐리면서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갔다. 재건축이 빚은 소멸의 현장에서 비로소 서로가 한 벽을 공유하고 맞붙어 살던 사이임을 알아차리는 모습과 같다.
윤: 무너져가는 아파트를 따라간 시선에서 향수나 연민, 분노 같은 감정의 호소는 느껴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미술평론가 정현은 “그의 사진은 사람에게 말을 걸기보다 응시를 유도한다”고 했다. 이 같은 작업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정: 철거 현장의 사진 중 어디에서도 굴착기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다. 처음 ‘-현장’ 시리즈를 발표했을 때 “그래서 정지현 작가는 재개발에 찬성하냐, 반대하냐”는 물음이 많았다. 그러나 경제적 이익이라는 가치가 우위를 점하는 현실 앞에서 찬반을 가르는 목소리는 사그라들고 무의미한 논쟁이 되더라. ‘-현장’ 시리즈는 그런 판단을 내리는 대신 재개발과 재건축이라는 도시 현상을 기록하는 일정한 프로세스에 초점을 맞췄다. 따라서 굴착기처럼 폭력적인 장면을 연상시키거나 자극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프로세스를 보지 못하게 하는 요소는 철저히 배제했다. 이제 ‘-현장’ 작업을 마무리한 지 10여 년이 흘렀다. 작업이 발표되던 당시 사진 속 아파트들은 하루빨리 재건축돼야 하는 부끄러운 대상으로 여겨졌는데, 재미있게도 시대가 바뀌면서 그 시절 문화를 대표하는 오래된 5층 아파트에 향수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이제는 그들이 옛 아파트를 소재로 다양한 활동과 이야깃거리를 만들어가고 있어 보람을 느낀다.

‘철거현장 01 내부’, 피그먼트 프린트, 120×160cm, 2013

‘재건축현장 9’, 피그먼트 프린트, 140×180cm, 2015
윤: 한동안 철거라는 파괴 현장을 기록했다면 최근에는 신축 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커미션으로 시작한 작업이지만, 신도시 건설 현장을 담은 ‘컨스트럭션 사이트’(2012) 작업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파괴에서 생성의 현장으로 시선이 이동한 계기는 무엇인가?
정: 우리나라는 개발 속도가 너무 빠르다. 한쪽에서 철거가 이루어지고 바로 옆에서 신축이 일어난다. 철거 현장에 있으면서 빨간색 벽이 빨간 돌멩이가 되고 그것이 다시 신축 현장의 순환골재로 사용되는 모습을 보게 됐다. 도시는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변화하고 있더라. 그때 마침 판교 신도시에서 새 아파트 단지가 한창 지어지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윤: 지어지는 건축 현장을 기록하기 시작하면서는 모든 조건이 반대가 되었다. 2017년 아모레퍼시픽 사옥부터 시작해 송은문화재단 신사옥(2019~2021), 삼일빌딩(2020~2021)의 시공 현장을 기록했는데, 그간의 경험과 어떤 차이를 체감했나?
정: 아파트 현장에 드나들 때는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다. 항상 쫓겨났기 때문이다. 페인트를 몇 십만 원어치 칠해 놨는데 다음 날 갔더니 그새 철거돼 버려서 눈물이 난 적도 있다. 그렇다고 “이날 몇 시에 철거해주세요” 라고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웃음) 커미션을 통한 건축 현장은 작업하기에 훨씬 안정적인 환경이다. 그럼에도 건설 현장은 늘 그렇듯 거칠고 변수가 많다. 일반적인 순수예술 작가들은 그런 현장의 변수를 따르기 힘들어 한다. 하지만 나는 오랜 기간 현장에서 습득한 경험이 있어 긴 시공 기간 동안 프로젝트가 좌초되는 일 없이 함께할 수 있었다.

‘컨스트럭션 사이트 12’, 피그먼트 프린트, 125×155cm, 2012

‘삼일빌딩 리모델링 건축현장: 커튼월’, 2020
윤: 작가에게 현장 기록을 의뢰하는 것은 일반적인 건설 현장의 기록과 다른 무언가를 기대한 것일 텐데, 무엇인지 궁금하다.
정: 해외에서는 이미 대규모 미술관이 지어질 때 현장 아카이브와 별개로 순수예술 형태의 기록물을 남기는 사례가 많았다. 작가는 건축물에 대한 정보를 담으면서도 동시에 작가로서의 순수 창작물을 만들어낸다. 보통의 건축 사진은 상품 사진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공간감이나 멋진 전망, 화려한 기술을 부각하는데, 때로 그런 장치가 공간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작년 10월부터는 국내 첫 사진 중심 공공미술관인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의 건설 현장을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과거 쓰레기 매립지였던 대지의 특징을 염두에 두고 굴착 공사를 할 때 드러난 지층의 단면을 촬영했다. 완전한 건축물로서가 아니라 아주 작은 지점에서부터 건물의 일생을 따라 밟는다는 것이 기존의 건축 상업 사진과 다른 점이다.
윤: 사진작가이기에 공간을 이해하는 관점이 건축가와 다를 수 있겠다.
정: 항상 건축가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려 한다. 기록하게 될 건축 현장이 주어지면 건축가부터 시공, 시행, 감리 담당자들과 소통하면서 건축물의 구조와 공법을 활용할 수 있는 작업을 함께 고민한다. 시공 전 인장 강도나 풍압 테스트 등을 하는 단계가 있는데, 그때부터 참여하면서 자료를 공유받는다. 현장에 가서도 여기는 무슨 공법으로 공사 중이고, 여기는 무슨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듣고 배운다.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그 건축물에서 건축가와 건축주가 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한다. 그러면 그것이 작품의 주제이자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기준을 잡아놓으면 몇 년간 다른 층, 다른 공간, 다른 시점에서 작업한 작품들이 서로 연결성을 보이더라. 추후 어떤 건축물을 촬영한 사진이라는 수식어와 분리되고 나서도 그 건축물을 다시 바라보게 하고 작품 자체로도 가치를 지니는 작업을 하고 있다.

‘컨스트럭트 010_5619’, 피그먼트 프린트, 135×180cm, 2017

‘리컨스트럭트 101_5268’, 피그먼트 프린트, 135×180cm, 2020

(왼쪽) ‘스트럭처 스터디 - 토폴로지 #01_8488’, 피그먼트 프린트, 210×160cm, 2019, (오른쪽) ‘리컨스트럭트 301_3953’, 피그먼트 프린트, 180×135cm, 2020
윤: 아모레퍼시픽 사옥 현장에서는 ‘컨스트럭트’(2017), 송은문화재단 신사옥 현장에서는 ‘토폴로지’(2019~), 삼일빌딩 현장에서는 ‘리컨스트럭트’(2020~2021) 시리즈가 탄생한 것이 그 예가 되겠다. 이러한 작품을 두고 “현장을 재활용한다”고 언급했다.
정: 이전에는 시공 현장이 10년, 20년 주기로 발전했다면 지금의 변화 속도는 몇 배나 빠르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가변적이고 유연해진 건축자재와 모듈 등의 발달한 건축 공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촉각을 세우고 작업에 활용하면 작품에 여러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특정 건물에서 촬영한 하나의 사진이 아니라, 비슷한 유형의 현대건축과 접점을 만들면서 이론을 확장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삼일빌딩은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우리나라 최초의 커튼월 건물로 시대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이기 때문에 커튼월의 복원 과정에 초점을 맞춰 기록했다. 그 현장에서 작업한 ‘리컨스트럭트’ 시리즈는 삼일빌딩을 구성하는 얇은 소재의 건축자재들을 이용한 것이다. 자재들을 평면적으로 배치해서 기존의 벽면이 새로운 자재로 덮이는 과정을 담았는데, 오래된 자재와 새로운 자재가 교차하다가 시공이 완료된 후에는 매끈한 건축의 단면에 거친 벽면이 감춰진다. 한편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현장에서 촬영한 퇴적층의 사진에는 실크스크린을 여러 겹으로 덧대어 시간성을 표현했다. 디지털 사진이 기록하지 못하는 질감과 시간의 켜와 같은 비물질을 물리적인 형태로 옮겨오고 싶어 시도한 작업이다. 이렇게 현장을 재활용하는 작업은 공간을 다양한 형태로 확장하는 행위이자 공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지반부터 쌓아온 건물의 일생을 완공 후에도 발견할 수 있도록, 땅과 벽 너머에 존재하는 구조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왼쪽) ‘리컨스트럭트 101_4911’, 피그먼트 프린트, 90×70cm, 2022, (오른쪽) ‘컷슬로프 #6020’, 피그먼트 프린트에 실크프린트, 90×70cm, 2022
윤: 건축물을 마치 사람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정: 나에겐 인물을 촬영할 때의 불안정성이나 건축물을 촬영할 때의 불안정성이 다르지 않다. 시시각각 변하는 건설 현장과 철거 현장은 기록하지 않으면 덮이거나 사라져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그래서 항상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촬영한다고 생각하며 작업한다. 건축의 표면을 칠하고 자재를 옮기고 그들이 내뿜는 먼지를 마시다 보면 건물과 내가 깊은 대화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신기하게도 그 대화를 추적하다 보면 건물이 가장 중심에 두는 요소와 마주하게 되는 때가 많다.
윤: 주로 거대하고 움직이지 않는 물체로 묘사되는 건축물을 불안정성에 빗댄 표현이 많은 걸 말해준다.
정: 숨가쁘게 변하는 시공 현장에 살다시피하다 보면 시간을 조금 다르게 감각하게 되는 것 같다. 가끔은 매일 변하는 현장에 부담감이 들 때도 있다. 지나간 장면은 돌아오지 않으니 말이다. 그럴 때일수록 고요한 시간에 건물을 찾아가 건축을 오롯이 마주하려 한다. 사실 작품은 나와 건축, 둘이 다이기 때문이다.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가지거나 전시되는 것은 다음의 일이다. 그만큼 건축을 담는다는 일이 나에게 매력 있는 작업이다.

Demolition Site 05 Outside, Pigment print, 120×160cm,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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