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2023년 6월호 (통권 667호)
건축은 사방, 사무소는 일방
건축
뻗어가는 관심 축, 돌아가는 시간 축
방을 정리하다 우연히 대학교 3학년 때 그려둔 다이어그램을 발견했다. 실선은 생각, 점선은 시간을 의미하는데, 이 다이어그램에는 여전히 내 건축적 태도가 잘 표현돼 있다. 먼저 생각의 축은 여러 방향으로 향한다. 자기만의 뚜렷한 색을 갖는 것은 의뢰인이 있는 업역에서도 가능한 일이고 어쩌면 자기 자신을 마케팅하기 위해 필요할 수단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건축은 전략 컨설팅과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하기에, 스스로 확고한 건축관을 갖는 것이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것은 시간의 진행방향을 나선으로 그린 것인데, 반복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생각 축이 있고, 또 만났을 때는 그 만큼 생각의 길이가 길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원 졸업 작업인 ‘배터, 치퍼, 패스터(Better, Cheaper, Faster)’(2005)는 CNC 밀링 기계로 가볍고 빨리 만들 수 있는 건축 구조에 대한 작업이었다. 이는 원심림(2017, 「SPACE(공간)」 597호 참고), 그리고 일정이 조금 늦어져 아쉽게 이번 호에 싣지 못한 두 개의 가(벼운)건물(모두 2023)과 직접 연결된다. 거의 20년 전, 새 기계에 대한 신기함으로 접근했던 가벼운 구조에 대한 실험은 다시 의뢰인의 매우 현실적인 고민과 만나 몇 개의 건물로 완성되고 있고, 개념적으로 그리고 상품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더 발전시켜야 할지 점점 명확히 깨닫는 중이다. 첫 「SPACE」 프레임(「SPACE」 587호 참고)에서 일단 닥치는 대로 작업하여 특수해를 모으고, 어느 정도 작업이 쌓였을 때 추상화를 통해 일반해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글을 썼었는데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이번 호에서도 앞으로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 몇 개의 생각 축을 그려본다.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배터, 치퍼, 패스터’(2005),
두 명의 비숙련자가 한 시간 안에 조립할
수 있는 3평짜리 구조 프레임
원심림(2017) / ©Yang Soo-in
이동 설치가 가능한 인공 숲 가(벼운)건물(2023)
얇은 스틸판을 공장 가공 및 가조립한 후 반입해 현장 작업을 최소화하는 프레이밍 시스템 / Image courtesy of Lifethings
침습수술: 공격적인 리모델링
삶것은 최근 들어 리모델링에 가장 주력하고 있다. 이전 건물을 포함한 대지를 고고학적으로 조사하고 새 건물을 디자인하기 때문에 신구의 대비가 도드라지는 공격적인 리모델링 결과물이 많다. 헬리녹스 크리에이티브 센터 부산(이하 HCC 부산) 입면에는 특히 깜짝 놀랄 만한 발굴물이 많아서 대비가 잘 부각되도록 디자인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실익보다는 명분을 위해 리모델링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 몇 년간 발생한 전 지구적인 상황에 의해 공사비가 급상승하면서 리모델링은 이제 실리적인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성장할 건축 시장이라고도 생각되는 바, 당분간 리모델링 작업에 집중할 것이다.


(왼쪽) PKM 갤러리(2015), 1966년
지어진 양옥을 갤러리로 리모델링
(오른쪽) 코스모40(2018), 화학공장 폐수처리동을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

(왼쪽) 헬리녹스 크리에이티브센터 부산(2023), 원 건축 때의 육각형 보와 두 번째 증축 때의 역보가 얽힌 모습이 발굴됨
(오른쪽) 헬리녹스 크리에이티브센터 부산(2023), 원형대로 남겨진 기둥, 첫 증축 시 잘려나간 원형 보, 이번 작업에서 보강된 보
예술가? 기술자? 전략가!
예술가도, 기술자도 아닌 전략 컨설턴트 같은 건축가의 역할도 계속 다시 만나게 된다. 현재 계획 중인 수직 증축 작업은 실내 공개공지라는 새 제도를 활용해 기존 공개공지에 대기주차를 확보하고, 장애인 엘리베이터로 추가 확보한 건폐율을 기계 주차장 설치에 할애해야 가능하다. 옆 부지의 독특한 상황 때문에 낭비될 수 있었던 컬쳐랜드 오피스의 후면 공간에는 문화상품권을 발권하는 기업의 특성에 기인해 긴 꼬리모양의 공연장을 제안했다. 세부적인 디자인이나 스타일을 제안하기에 앞서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이라고 부를 만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일은 건축가가 의뢰인의 신뢰를 얻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며, 상호 신뢰가 형성되어야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기대할 수 있기 마련이다.
창의적인 율사
건축을 하며 흥미를 느끼는 가장 의외의 영역이 건축법이다. 같은 법을 갖고도 서로 다른 변호 전략으로 다툴 수 있듯 건축법, 지구단위계획, 조례, 심의의견 등은 생각보다 해석의 여지가 많다. 보통집(2020)은 건폐율 20%라는 제약을 기회로 삼았고, 평창동 갤러리 주택(2021)은 이중 나선계단의 면적은 한 번만 적용하는 관례로부터 착안했다. 어떤 작업을 진행하던 단순한 법규 검토 이상으로 건축법을 창의적(?)이게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스포츠의 룰과도 비슷하다. 룰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어느 정도까지의 행위가 반칙이 아닌지 알면 더 신나게 플레이 할 수 있는 법이다.
만드는 방법을 만드는 것
정밀함을 디자인하는 것은 예술적이지만, 오차를 디자인하는 것은 산업적이다. HCC 부산의 입면은 열 개의 곡면으로 이뤄져 있는데, 제작 벽돌은 단 두 종류로 만들어졌다. 각 곡면에 대응하는 벽돌을 여러 종류로 제작해 품을 들이기보다는 언뜻 보았을 때 자연스러워 보이는 정도로, 두 제작 벽돌 설치 시 발생하는 오차를 분배하는 방법으로 디자인했다. 무언가를 만드는 방법을 만드는 것은 산업적 스케일의 효율을 확보하는 것이며, 건축가로서 언제나 관심 있는 영역이다.
사무소
좋은 건축, 좋은 사무소
삶것에 모인 모든 이는 좋아하는 건축을 공부하고, 업으로 삼아 성인 시절의 전부를 살아왔다. 따라서 사무소를 통해 구성원 개개인이 갖고 있는 지적 욕구와 창작욕을 충족할 수 있는 좋은 건축 작업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좋은 건축을 한다고 해서 저절로 좋은 사무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사무소는 건강한 근무 여건과 안정적인 경제적 보상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건축사무소 운영자가 좋은 건축과 좋은 사무소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좋은 사무소는 절대로 될 수 없다.
프로구단과 같은 구성원 관계
사무소는 독특한 공동체다. 사무소와 그 구성원은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고 노동을 제공받는 계약 관계임이 분명하다. 사무소의 구성원들은 더 높은 연봉을 위해, 혹은 독립이나 유학을 위해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사무소에는 단순 고용인과 노동자 간의 관계를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 최근 어떤 IT기업이 스스로를 프로스포츠 구단처럼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공감이 갔다. 우승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노력하며 독특한 유대감을 공유하는 프로선수들과 같이, 사무소의 구성원들도 혼자서 작업하는 것보다 더 규모 있고 질 좋은 작업을 함께 이뤄낼 수 있다는 집단적인 성취감을 느낀다. 프로스포츠 구단은 일방적인 도제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이전 세대의 사무소와 다르고 일반적인 회사와도 약간은 다른, 동시대 건축사무소 구성원들 간의 독특한 관계를 이해하기에 적합한 모델이라 생각한다.
10명 이상, 기업 위주
좋은 사무소가 되기 위해서 안정적인 운영은 필수다. 나는 『사장의 일』에 나오는 “오늘 눈이 내리는 것도 사장 책임이다”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사무소의 운영에 있어서 만큼은 굉장히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의도적으로 에고(ego) 없이 건축을 대하는 유연함과는 정반대의 자세다. 한국에서 사무소를 개소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아틀리에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확률을 높이려면 둘 중 하나의 방식이 적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① 직원 1~3명 정도, 개인 건축주 작업을 위주로 하는, 이를테면 일 년에 멋진 주택 두세 개 정도를 작업하고 문고리와 같은 세밀한 디자인도 즐기는 진짜 아틀리에 사무소. 혹은 ② 직원 최소 10명 이상, 기업 건축주 작업을 기본으로 하는, 아틀리에지만 조직 대 조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무소. 둘의 중간, 즉 직원 4~9명 정도에 대부분 개인 건축주의 일을 하는 사무소는 적어도 내가 경험하기에는 가장 생존하기 힘든 형태였다. 삶것은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작업도 독립적으로 해보고 싶었기에, 일찌감치 10명 이상의 조직을 갖추고 기업 건축주와 대부분의 작업을 하는 사무소로 방향을 잡았다. 의미 있는 공공 작업일지라도, 과정이 복잡하고 지난한 관발주 작업이나 당선의 확률이 낮은 일반 공모전은 어지간히 좋은 기회가 아닌 이상 고려하지 않았다. 항상 눈앞의 득실보다 지향점에 맞는 결정을 택해왔다. 지금 삶것의 구성원은 15명이고, 기업 건축주 위주로 작업하며, 재미있는 개인 건축주 작업도 병행한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사무소의 규모는 조금 더 키울 것이고,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당분간 신축보다는 리모델링 작업을 우선할 것이다.

(왼쪽) 평창동 갤러리 주택(2021), 이중 나선계단 동선 개념도(오른쪽) 보통집(2020), 건폐율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땅에 묻은 집, 동남향 중정을 통해 생활 환경을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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