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민과 조율, 그리고 공감
글 정영주(단국대학교 영미인문학과)
최근 친구와 재밌는 일을 도모하려 한 적이 있었다. 함께 다닌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재료 삼아 티셔츠나 유리잔 따위의 것들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 둘 다 즐겁게 시작한 일인데 어느 순간부터 일을 진행하는 게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이더라도 모든 생각이 같을 수는 없었고, 평소에는 좋은 화학작용을 일으키던 우리의 다른 점들이 함께 일을 벌이기로 한 시점부터 공포탄이 되어 서로에게 날아갔다. 다행히도 아직까진 해를 입지 않았지만 언젠간 실탄이 되어 날아올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순간이 두려워지던 찰나, 「SPACE(공간)」 4월호에서 피그건축사사무소의 원 멤버 김대일, 김한중과 이주한 소장의 대담을 읽었다. 결국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해답을 찾아가는 방식”을 통해 서로에게 이로운 방향을 향해 나아간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고민과 조율, 그리고 공감은 그들이 해답을 찾아가는 길목에 세워 둔 이정표가 되었다.
고민
갈등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지는 ‘고민’을 하는지에 달려있다. 고민한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문제를 발견하기 위한 목적으로써 갈등 상황은 긍정적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세 명의 소장이 피그건축사사무소에서 함께 일할 때 각자가 맡은 프로젝트에 대해서 자율성을 가질지, 통일된 무언가를 유지할지를 두고 고민했다던 대목이 떠오른다. 그 고민의 끝은 세 사람의 독립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각자에게 알맞은 길을 찾은 거다.
조율
고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황에 대해 더 넓은 시야를 가지면 ‘조율’할 수 있다. 조율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는 말이다. 이주한 소장이 더 나은 아이디어를 위해 수시로 설계를 바꾸다가 야근을 하게 되는 직원들의 처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처럼 말이다. 나에게는 의심의 여지 없이 좋은 일임에도 타인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 결국 그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라인이랄까, 규칙을 확실하게 잡아나가면서 그것에 부합한다 아니다로 소통”하자는 원칙을 바탕으로 설계한다. 본인도, 상대방도 납득할 만한 약속을 통해 갈등 해결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것이다.
공감
조율이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면 ‘공감’은 그의 처지를 나의 처지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서로 간에 합의점을 찾고 나면 우리는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설계공모에 당선된 김대일 소장이 심사위원들에게 다가가 본인 안에 관해 대화했던 일도 공감을 활용한 것이었다. 심사위원단이 김대일에게 깊이 공감해 심사평을 얘기해줄 때 그는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었다. 곧 자기만의 해답을 찾은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소통’에 있었다. 팀 내부 인원 혹은 외부 인원과 소통할 때 그들은 비로소 실마리를 찾곤 했다. 고민에서 조율로, 조율에서 공감으로 나아가는 여정에 함께한 것도 다름 아닌 서로 간의 머리를 맞댄 대화였다. 소크라테스는 진리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만 진리로서 존재한다고 했다. 결국 옳고 그름은 없는 것이다. 모두의 말은 맞고 때로는 틀릴 수 있다. 그저 무엇이 우리에게 가치 있는지 생각하는 일이 ‘의미 있는’ 것이다.
공감을 이끄는 명확한 건축
글 김수진(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건축은 공감 없이 완성될 수 없다. 먼저 건축은 필수적으로 건축주의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하고, 건축법규를 준수해 안전한 건물로써 사회의 공감을 얻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없이는 건물은 지어질 수조차 없다. 그뿐인가? 좋은 건축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대지의 특성을 살려 주변 사람들과 도시의 공감을 얻어야 하고, 더 나아가 대중이 건축에 공감해야 한다. 건축에서 이런 공감은 어떻게 가능한가?
일반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것에 공감하는지 생각해 보자. 좋은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이야기의 전개를 통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자연스럽게 도달하고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영화의 공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짜임새 있는 이야기, 이야기와 관련된 의미 있는 주제 의식, 그리고 이야기와 주제를 연결하는 연출, 연기, 소품 등의 다양한 스킬과 디테일이 그것이다. 이야기에 필연성이 없다면 관객은 이야기의 흐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주제 의식이 없다면 영화는 관객의 기억에 남지 않을 것이며, 이야기와 주제를 연결하는 스킬과 디테일이 빈약하다면 관객은 영화를 억지스럽다고 평가할 것이다. 이야기와 주제, 스킬과 디테일이 하나로 모일 때 관객은 영화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건축도 영화와 다르지 않다. 대지의 특성에 기반한 명확한 논리, 그 논리에서 도출되는 형태, 그리고 논리와 형태를 연결하는 구조와 평면과 같은 디테일들이 공감을 이끄는 건축을 만든다. 논리, 형태, 디테일 세 가지가 모두 갖춰진다면 건축은 좋은 영화가 그러하듯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하나의 이야깃거리를 던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무언가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이게 대체 뭔가’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저급 영화처럼 누구도 공감할 수 없는 건축이 되어버리기 쉽다.
문제는 건축이 영화와 글보다 공감을 이끄는 구성을 갖추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예산과 법규를 지키며 건물의 기능을 해낸다는 목표를 우선적으로 달성한 후에야 공감을 일으킨다는 목표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논리를 가지고 진행되던 설계도, 실시설계에 가서 예산과 구조, 법규를 지키기 위해 씨름하다 보면 명확한 논리가 흐려지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설계라도 건축주의 예산이 부족하다는 말, 구조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말, 허가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 앞에서는 그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SPACE(공간)」 4월호에 소개된 이주한의 작업은 그런 실시설계 단계를 지나 준공된 건축에서도 자신의 논리를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데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복잡하지 않고 명쾌한 논리로 건축을 완성하고, 변수가 생기면 단단 기숙사에서 수직하중이 층간 불연속되는 구조를 사용한 것처럼 독창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 과정에서 피그건축사사무소의 작업은 조성익(홍익대학교 교수)이 비평한 바와 같이 명쾌한 논리를 앞세운 ‘맥락 건축’에서 이야기를 가지는 ‘오브제 건축’이 된다. 명쾌한 맥락에서 온 오브제 건축은 누가 보더라도 논리를 읽을 수 있어 쉽게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다. 예산, 법규, 구조 등 현실의 복잡한 문제에도 명확함을 잃지 않는 건축이라는 점에서 피그건축사사무소의 작업에 박수를 치고 싶다.
예산의 제약이 없는 학생설계에서도 나만의 논리를 잃어버리기가 쉽다고 느낀다. 언젠가의 학기 말엔 나조차도 내 설계에서 명확한 콘셉트를 볼 수 없는 것 같아 좌절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명확한 논리로 세상에 말을 거는 건축을 동경하며, 그런 설계를 하기 위해 계속 도전하는 중이다. 이런 내게 “설명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건축”을 하는 이주한과 피그건축사사무소의 작업은 건축학과 학생으로서 내가 바라고 지향하는 방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앞으로 피그건축사사무소가 얼마나 더 넓은 맥락을 보고, 더 공감되는 건축을 만들며 결국 얼마나 더 좋은 건축을 보여줄지 기대한다.

신호등
글 장하린(한양대학교 실내건축디자인학과)
마치 포토샵으로 명도 값과 채도 값만 낮춘 것만 같은 온통 회색인 철거 현장 속에서 왠지 모르게 생기를 주는 부서진 빨간색 덩어리의 모습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정지현 작가의 사진은 빨간색이 이리도 강력한 색이었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했다.
그의 작업에서 빨간색은 무엇을 의미할까? 일상에서의 빨간색은 어플리케이션에서 확인해야 할 새로운 알림이나 윈도우 화면의 종료 버튼을 연상시킨다. 그가 담은 철거 현장 속 빨간색은 우리에게 휴대폰 알림처럼 철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듯이, 또는 이것이 건물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것을 연상시켜주듯이 다가온다. 의외로, 사진 속 빨간색은 빨간 벽 그 자체가 아닌 빨간색 외의 것에 주목하게 만드는 이상한 착시 효과를 일으킨다. 마치 신호등의 빨간 불 앞에서 모두가 멈춤이 되듯이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빨간색 요소는 보는 이를 잠깐 멈춰서 생각을 하게 만든다.
때로는 수백 장의 도면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욱 와닿는다. 정지현 작가는 “지나간 장면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매일 변하는 현장에 부담감이 들 때가 있다”고 말한다. 아파트의 모양은 천편일률적인데 철거한 아파트의 모습 마저도 똑같은 회색의 덩어리다. 그는 회색 덩어리 속에서 빨간색 페인트를 칠하고 편집해 각각의 방들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시킨다. 그러면서 단순한 회색의 장면이 아닌 기억에 오래 남는 여운을 만든다. 그렇다면 빨간색 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 벽을 통해 무엇을 느껴야 하는 걸까?
엄청나게 크고 높은 스케일의 무언가가 포클레인의 삽질 몇 번에 작은 덩어리들이 되어 어느새 내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스케일이 돼 버린 것에 대한 묘한 상실감이 있다. 이 상실감은 사실상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을 것이다. 추억 속 무언가가 사라진 장소에 어떠한 것이 들어오더라도 그 추억 속 장면은 이미 다시는 볼 수 없는 장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린 이 빨간색 벽을 보며 무슨 감정이 들어야 하는 것일까? 허무함, 상실감, 회상 등의 감정이 들 수도 있고, 되려 아무 감정이 들지 않을 수 있다. 어떤 감정이 들던 잠시나마 멈춰 바라본다면 그 자체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떼어냄
글 류예승(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공학과)
도시를 공부하면서 맞닥뜨리는 가장 힘든 선택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우느냐다. 한국은 자족적인 역사와 문화를 가진 나라지만, 지금의 서울은 일관성이 없고 중구난방의 모습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서울의 지역을 주제로 과제를 할 때면, 서울의 역사성을 지키기 위해 지역의 특징을 남겨야 할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특징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특징을 지워야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이야기를 듣겠다고 대상지를 찾아가면 다른 문제에 부딪힌다. 그곳에서 나는 항상 이방인으로 취급받는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역 사람들의 냉담한 태도를 볼 때면 이런 곳에서 공공성을 찾는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도시가 개인의 삶에 얼마나 개입할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감이 거주자들의 태도에 대한 실망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지현 작가는 ‘아파트 키드’ 세대로 자라나면서 서울의 1세대 아파트 단지가 허물어지기 전 위태로운 모습을 보았고, 이에 대해 다양한 물음을 던진다. 건물의 모습 그대로를 영정사진으로 간직하던 그도 동네 곳곳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혹은 재개발 사업의 방해 요소쯤으로 생각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장’ 시리즈는 무언가를 고발하거나 자극적이고 단편적인 부분을 노출하는 대신 기록 자체에 초점을 둔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사람들 누구나 한번쯤은 사용해 봤을 공간의 모습을 회상하게 한다.
벽이나 기둥이 허물어져 가분수처럼 덩그러니 서 있는 건물을 기록한 작품을 보며 “불완전하다.”라는 느낌에 마음을 졸였다. 그들도 인간처럼 태어나 여러 사람과 함께 살아가다가 수명을 다해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지만, 그 안에서 벽을 맞대고 살아갔을 삶의 이야기들이 있으리라 짐작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으로 지역의 이야기를 듣고 공간을 바꿔 나가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나는 그 삶의 이야기들을 보내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려 한다. 이것은 '지우기’가 아닌 ‘떼어냄’이다. 이야기들을 적어 떼어내고, 언제든지 볼 수 있도록 마음 한편에 쌓아 둬야지. 쌓인 이야기와 경험들은 사라지는 이야기가 아닌 새겨지는 이야기로 진화할 것이고 우리가 그리는 미래의 발판이 될 것이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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