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3년 7월호(통권 668호)

한승재는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한양규의 모습을 그려 디자인캠프문박 디엠피의 계단 공간에 전시했었다. ⓒ한승재
[CRITIQUE] 그럼 어떡혀
여행 중에 런던국립극장 로비에 들어와 글을 쓰고 있다. 양규가 빨리 크리틱 원고를 넘겨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노트북을 펴고 일을 할 만한 장소를 기웃거리다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다. 나 말고도 간단한 음식을 먹거나 컴퓨터로 일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런던국립극장은 거칠고 무거운 브루탈리즘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언뜻 중요한 일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무척 자유롭게 이용되고 있다. 아름다운 건물이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건 사용자로서 느끼는 고마움이다. 갈 곳이 없을 때 갈 만한 가장 만만한 장소. 이런 고마운 장소가 나에게는 어디였을까? 가방을 메고 이 카페 저 카페 전전하다가 도로 집에 들어가곤 했던 서울에서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나에게 그런 고마운 공간은 없었던 것 같다. 카공족이니 뭐니 하던 서울의 단어가 떠올라 슬퍼졌다. 다행히 나에겐 이런 슬픔을 나눌 만한 친구가 한 명 있다. 싫은 걸 이야기하면 분기탱천하는 사람, 좋은 걸 이야기하면 우리가 그런 걸 만들어보자며 결의를 다지는 사람, 불을 붙이면 활활 타오르고 조금만 찬물을 부으면 확 사그라드는 연탄 같은 사람. 양규라면 분명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해줄 것 같았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카공족의 슬픔을 이해하고 장소의 고마움을 공감해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양규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양규의 대학시절 포트폴리오는 뜨거운 연탄 이미지로 시작한다. 졸업을 앞둔 건축학과 대학생들은 사진 한 장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유치한 시도를 잘 참지 못하는데 양규의 경우에 그것은 연탄이었다. 연탄이란 더럽고 촌스럽지만 따뜻하고 고마운 연료다. 그리고 서민적인 연료다. 연탄은 스스로 태우며 주변을 뜨겁게 달군다. 양규도 마찬가지로 혼자 뜨겁게 타는 사람이 아닌 주변 사람들을 끓어 오르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대단한 일을 하고 싶어 했고, 그걸 혼자서 하기보다는 주변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 했다. 학교에서 그리고 작업실에서, 사람들을 다그쳐가며 우리도 멋있는 걸 한번 해보자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피곤한지 연탄을 주변에 둔 사람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양규는 여러 설계사무소에 지원했다. 하지만 포트폴리오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일산화탄소 기운을 감지한 그들은 모두 양규를 떨어트렸다. 공간건축건축사사무소 면접장에서는 ‘마지막 질문 없냐’는 면접관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왜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느냐’며 멀쩡히 있는 사람들을 나무라다가 혼자서만 떨어졌다고 한다.나대기 좋아하는 그를 받아준 곳은 디자인캠프문박 디엠피(이하 디엠피)가 유일했다. 내가 양규를 처음 본 건 디엠피 신입사원 시절이었고, 그때 양규는 불과 실무 2년차에 불과한 햇병아리 시절이었다. 드디어 무언가를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양규는 부리부리한 눈을 뜨고 주둥이를 삐쭉 튀어나오게 해 거의 코에 붙이다시피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유심히 쳐다보다가 너무 일에 몰두한 사람이 있다면 옥상에 올라가 바람 좀 쐬자고 말하는 둥, 누군가 그에게 고마워할 만한 일을 열심히 했다. 디엠피에선 신입사원 시절의 양규가 사장실에 쳐들어간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아이티에 지진이 발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뭔지 모를 감정에 복받쳤던 양규는 다짜고짜 사장실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대뜸 문진호 사장에게 이야기했다. “사장님! 지금 우린 대체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죠?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건축가라면 말이에요!” 문진호 사장은 허허허 웃으며 양규를 기특하게 여겼고,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제안해 달라며 역으로 양규에게 부탁했다. 양규는 알겠다고 말한 후 굳게 입을 다물고 문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는 사장실을 방문하지 않았다. 양규는 단지 뜨거웠을 뿐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생떼에 가까웠던 양규의 투정은 유행 지난 젊은이들이 내뱉던 목소리와 비슷했다. 눈물도 슬픔도 없던 어린 시절에 나를 울린 어떤 노래들과 비슷했다. 세상이 아직 우리 손에 있다고 믿었던 늙은 젊은이들은 노래를 통해 세상에 팻말을 내걸곤 했다. 천국도 나라도 종교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던 존 레논의 목소리를 들을 때,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느냐며 분개하며 소리지르던 포 넌 블론즈(4 NON BLONDES)의 빨갛고 큰 입을 보았을 때, 움직이지 않던 큰 돌이 굴러가는 것만 같은 거대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 당시의 나는 누군가의 한마디에 크게 감화되고는 했었다.
난 가끔 침대에 누워 울음을 터뜨리곤 해.
머리 속에 든 생각을 뿜어내려고 말이지.
그럼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면 정말 기분이 좋아져.
그리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거야.
도대체 이놈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 포 넌 블론즈, ‘와츠 업’ 가사 중
그런 나에게 양규는 반가운 동료이자 나의 도구였다. (내가 하는 말 잘 들음) 양규도 아직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너도 세상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구나… 너도 나만큼이나 멍청하구나…. 나는 양규에게 다가가 친하게 지내자고 말하며 내가 비록 후배지만 나이는 동갑이니 말을 놓겠다고 말했다. 당시 한진이는 히피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머리가 길었고, 존 레논처럼 동그란 안경을 썼고, 플레이밍 립스의 ‘두 유 리얼라이즈’를 즐겨 들었다.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자유’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한진이는 나와 양규보다 어리지만 내가 양규에게 반말을 하니 자신도 양규에게 말을 놓겠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 세 명은 몽상가로 만나게 되었다. 나와 한진이는 술을 마시며 꿈같은 소리를 늘어놓는 타입이었다면 양규는 둘보다 더 막무가내였다. 가만 있지 말고 뭐라도 해보자며 몸부터 움직이고 보는 타입이었다.
양규는 낭만이 살아있어 설계할 때 손으로 그림을 시작한다. 노란 트레이싱지에 (절대 하얀색 트레이싱지 안 씀) 정성스럽게 평면을 그리고 지우개로 지우기를 반복한다. 양규의 뜨거움은 종이를 뜨겁게 달구며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지만 네모난 틀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양규에게 설계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성취감이다. 스스로에게 문제를 내고 스스로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는 게임을 계속한다. 마치 퍼즐놀이를 하는 것처럼 양규는 사각형 틀을 만들고 그 안에서 관계를 풀어가는 게임을 즐긴다. 면목동 클로버에서 양규는 공간을 나누는 게임을 시작했다. 흔히 공용 공간으로 사용하는 계단을 세대마다 따로 두어 각각 입구를 다르게 한 것이다. 면목동 클로버를 방문해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계단을 오르던 순간이다. 나무를 오르듯 이리저리 꺾인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면 위에 깨끗한 벽과 적절한 창문이 나타난다. 그 공간은 땅으로부터 분리된, 마치 나무 둥지 위 새집처럼 안락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입을 가득 채운 이빨처럼 계단으로 가득 찬 그 집의 평면도를 알고 있는 이상 ‘작은 집에 계단이 너무 많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단 하나의 공용 계단을 사용했다면 집이 더 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함께 일하는 팀원이 양규를 대신해 변호해주길, 양규는 낭비를 싫어하기 때문에 오히려 계단을 따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조금의 공간도 방치해두고 싶지 않은 거라고 말했다. 계단이 공용 공간이 되면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이 되지만 계단이 나의 것이라면 나의 공간이 된다. 그러니까 내 계단이 생기면 그것을 아끼게 된다는 말이다.
후암동의 추억 설계는 양규 스스로 낸 문제가 아니다. 양규는 이곳에서 가장 난해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제약들 때문에 건물을 세우는 것 자체가 도전이 되어버렸다. 건물을 둘러싼 도로 폭이 넓어지며 땅이 좁아지고 땅의 급한 경사 때문에 차 한 대 주차하는 것도 쉽지 않다. ‘여섯 개의 일차함수 그래프의 접점을 구하시오.’ 양규는 어려운 조건 속에서 건물이 설 수 있는 자리를 힘들게 찾아 계단을 욱여넣었다. 그리고 나머지 공간을 알차게 쌓아 공간을 만들었다. 인허가만 3년, 한번 해보겠다는 시공사를 찾는 데도 3년이 걸렸다. “세상에 양규야, 너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여기에 건물을 지었니?” 이런 질문은 양규에게 맛 좋은 먹이가 된다. 양규는 이때다 싶어 속에서 펄펄 끓는 연탄을 잠시 꺼내어 보여준다. f(x)=ax+b, f(x)=bx+c, f(x)=cx+d. 공식을 정성스럽게 설명하는 걸 듣고 있으면 왜 이렇게까지 자세히 이야기하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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