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4년 1월호 (통권 674호)

호흡하는 건축
유기체로서 건축은 인간, 자연, 도시 환경과 관계를 맺으며 생명력을 갖게 되는데 나는 이것을 호흡에 비유한다. 흔히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호흡’이라는 표현을 사용는데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경우에만 쓰이는 단어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팀워크를 이야기할 때 ‘호흡을 맞춘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다. 건축은 결코 독립적 유기체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 주변 환경 등과 관계를 이루면서 존재의 이유와 가치가 생긴다. 호흡이 곧 생명력이라고 전제한다면, 건축과 환경의 관계에서나 인간과 건축의 관계에서도 균형 있게 호흡이 잘 맞아야 건강한 생명력을 갖게 된다. 자연스레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며 호흡하듯, 그 모든 관계가 공기의 흐름과 같이 매끄럽고 자연스러울 때 비로소 우리는 그 건축 안에서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건축가의 태도
‘건축은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가’ 하는 질문의 답은 건축가의 태도에서 나온다. 연주자나 성악가들이 “내 몸은 악기다”라는 표현을 많이 하는데, 곡을 연주하는 데 악기 자체가 주인공이 될 수 없듯, 건축가를 연주자에 비유하면 건물 자체가 오브제로서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 건축이라는 아름다운 음악을 남길 때 건축가는 그저 악기일 뿐이다. 이때 상황에 따라 취해야 하는 건축가의 태도는 매우 다양할 것이다. 이를 고민했던 사례로 유동룡미술관(2022)을 언급하고 싶다. 제주에 지어진 유동룡미술관은 세상을 떠난 건축가 이타미 준의 건축 사상과 철학을 기리기 위한 장소다. 이타미 준이 남긴 건축 작품을 전시할 뿐 아니라, 그가 생전에 화가와 시인으로 활동했던 전방위 예술가였다는 점을 고려해 시대정신을 품고 작업하는 다양한 분야의 동시대 작가들의 전시 공간으로 기획됐다. 건축가의 이름을 딴 미술관인 만큼 나는 철저히 이타미 준을 의식하면서 설계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을 아무리 의식하고 설계한다 해도 결과물에는 설계자의 미의식이 가미될 수밖에 없다. 자신만의 설계 습관이 건축이나 인테리어 어딘가에 반드시 표출되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성과 건축물의 기능 사이 균형’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건축가에게 요구되는 역할에 따른 태도는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기능에 따라 다채롭게 변주된다.


자연과 건축
건축가에게는 그 건축물이 속할 환경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건축이란 기획에서부터 현장을 마무리하는 최종 단계까지 수많은 의사결정들이 반복되는 긴 과정이다. 설계자가 어떤 태도로 건축과 환경이 어떻게 관계를 맺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순간 디자인 결정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이타미 준은 후기 프로젝트들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매개체로서 건축’을 고민했고 그 결과로 수, 풍, 석 미술관(2006)과 방주교회(2009)라는 열매를 맺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지구의 긴 역사에서 볼 때 작은 점으로밖에 존재하지 않을 건축물의 존재를 의식하고, 건축가가 대지를 대할 때 겸허한 마음과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며 ‘환경과의 조화’, ‘순응’ 등을 강조했다. 나 역시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만큼은 아버지의 사상을 몸으로 흡수하며 체득한 덕인지, 대지를 마주할 때 본능적으로 그 땅이 가진 조건과 환경을 거스르지 않으려 한다. 시호재(2023) 역시 이런 사상이 내재되어 있기에 나온 결과물이다. 주변 환경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유기적으로 주변과 관계를 맺으며 그 풍경에 스며들고자 했다. 이러한 설계 방식은 의식되지 않는 DNA처럼 깊이 내재되어 있으며 고도로 훈련받은 사고를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건축가는 직관에 의한 디자인을 반복하면서 그 레이어를 더해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직관은 건축을 구성하는 여러 물리적 요소들을 아우르는 힘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태도를 품은 의식의 흐름은 건축이 크게는 환경과 도시와의 관계를 맺을 때에도, 작게는 인테리어에서 자연과 인간의 접점이 이루어지는 순간에도 존재한다. 내게 자연은 경치가 좋은 풍경을 품은 것일 수도, 근경의 정원이나 하늘, 빛, 또는 바람일 수도 있다. 내외부에서 어떻게 하늘을 투영할지 또는 빛을 어떻게 공간 안으로 끌어들이고 차경과 근경의 균형을 담을지 등 자연과 인간의 만남에서 생기는 순간(moment)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영화로 비유하면 주요 장면이 될 수도, 그 자체로 주된 스토리가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공간에 대한 기억을 그려나간다.
맥락적 합리성
건축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건축가는 자신이 설계할 건물이 속할 지역의 환경, 역사 문화 등의 맥락에서 나름대로 합리적 선택을 해나간다. 유한한 시간과 예산 속에서 저마다의 맥락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나름의 미의식에서 나오는 직관을 바탕으로 결정을 해나가는 것이다. 애초에 완벽한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지가 저마다 가진 조건 안에서 사회적 책임과 기능에 충실하면서 얼마나 진중하고 성실하게 작업에 임하느냐에 달렸기 때문이다. 이는 건축가에게 요구되는 당연한 덕목이기도 하다.
지난 22년간 ITM유이화건축사사무소(전 이타미준건축연구소 서울지사)를 운영하면서 비슷한 조건을 가진 프로젝트는 단 하나도 없었다. 오롯이 그 장소에 적합한 설계를 해야 했고 매순간 새로운 도전과 난관이 공존했다. 앞서 건축가의 설계 과정을 음악가의 연주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건축가는 수도 없이 반복되는 프레이징과 정교한 아티큘레이션을 통해 세분화하며 내가 연주하고자 하는 건축의 시적 순간을 만들어나간다. 똑같은 악보를 보면서 연주해도 연주가에 따라서 곡이 다르게 해석되듯 건축가 또한 대지를 해석하고 디자인하는 방식에 따라서 결과물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험을 통해 얻어진 지식, 즉 암묵적 지식이 보다 명확하게 되거나 보다 쓸모 있어지는 사회적 과정을 겪기도 한다.
작가성과 고유성
건축가로서의 작가성과 고유성을 유지하려면 끊임없는 단련이 필요하다. 매번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합리적 맥락을 고려하며 직관력을 발휘하고 복잡한 상황을 구조화하는 동시에 납득 가능한 형태를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작가 고유의 철학과 언어를 만들어내며 시대성을 고려한 자신만의 미의식을 꾸준히 성숙시켜 나가야 한다. 그래야 직관력이 발휘된 고유성이 생기고, 이러한 단련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 발전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오브제로서의 건축이 아닌 인간의 행태와 문화를 담고 사회와 환경과의 건강한 호흡을 맞추며 가치를 창출해내는 건축. 시대를 담은 이로운 건축을 추구하고자 한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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