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4년 1월호 (통권 674호)
2023년 9월 22일부터 10월 1일까지 파블로 피카소의 서거 50주년을 기념하며 전시 〈라 메르세 데 피카소〉가 열렸다. 전시 장소인 바르셀로나 메르세 광장에는 흰 배경의 구조물이 놓여 있을 뿐 아무런 작품도 보이지 않는다. 피카소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이 있던 자리지만 건물은 모두 철거됐고, 매년 9월 말이면 떠들썩하게 축제를 벌이지만 평소에는 방치되는 빈 땅. 메르세 광장에는 다양한 층위의 기억이 쌓여 있다. 공공 공간에 대한 집단의 기억이 지역사회를 연결할 수 있다고 믿는 다니엘 오(고려대학교 교수)가 증강현실 기술을 이용해 이곳에 누적된 기억을 소환하고, 새로운 기억을 주입한다. 증강현실과 몰입형 도시 체험의 기술에서 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전시 파빌리온이 설치된 메르세 광장 전경
잃어버린 집단기억의 발견
오늘날 메르세 광장은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축제인 ‘라 메르세’가 열리는 광장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라 메르세에는 매년 200만 명의 방문객이 모여든다. 그러나 축제 기간 외에 광장은 대부분 비어 있거나 방치된 듯 보인다. 최근 몇 년 동안 특히 저녁 시간대의 메르세 광장은 불법 활동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장소가 됐다.
이러한 메르세 광장에 대한 나의 인식은 이곳의 오랜 거주자의 이야기 한마디로 바뀌었다. 메르세 광장은 1981년, 도시의 인구 밀도가 높아지자 절실해진 공공 공간을 만들기 위한 도시 재개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다섯 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하나의 도시 블록을 철거하면서 조성됐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허물어진 건물 중 하나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와 그의 가족이 살았던 집이라는 사실이다. 평생을 한 동네에서 살아온 주민들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집단기억은 세대 교체와 새로운 주민들이 유입되는 시간 속에서 잊혀지고 있었다. 시간뿐만 아니라 실제 건물의 파괴는 기억의 상실을 가속화했다.
도시의 공공 공간을 통해 지역사회에 힘을 싣는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도시 디자이너로서, 이러한 집단기억의 상실은 흥미로운 질문을 상기시켰다. 130년 전 피카소가 바르셀로나에서 겪은 경험이 현시대의 바르셀로나 시민들에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을까?
지역사회에 대한 소속감
우리는 누구나 체류 기간과는 상관없이 거주하거나 방문하는 장소에 대해 개인만의 고유한 인상을 구축한다. 특정한 공공 공간에서 형성된 의미 있는 추억과 관계는 그 도시 공간에 대한 주인의식을 높이고, 이는 지역사회에의 소속감으로 이어진다. 많은 연구는 이러한 소속감이 안전하고 건강한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이는 공공장소와 관련된 새로운 연결과 기억을 지속적으로 만들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역축제는 공공장소와 연결된 집단기억을 만들고 갱신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다. 라 메르세 축제 기간 동안 개최한 전시 〈라 메르세 데 피카소〉는 메르세 광장에 새롭게 발견한 집단기억을 이식하고, 이것이 거주민과 방문객에게 지역사회에 대한 새로운 주인의식과 소속감을 심어주기를 바라며 시작됐다.
피카소는 13세부터 22세까지 바르셀로나의 고딕지구에서 살았다. 청소년기의 발달은 가족, 친구, 학교, 이웃, 사회와 같은 사회적, 지역적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전시는 100여 년 전 청소년이었던 피카소와 그의 가족이 한때 살았던 장소로의 시간, 그리고 공간 여행이다. 방문객은 전시를 통해 피카소를 형성하고 영감을 준 환경을 탐험한다. 전시는 1900년 초의 바르셀로나를 소개하면서부터 시작되는데, 방문객은 사회적, 문화적, 시대적 배경과 그 시간 속에 겹겹이 쌓여 있는 일련의 사건들과 인물들을 통해 피카소의 청소년기를 경험하게 된다.

방문객은 위치 기반 데이터를 이용한 증강현실에서 피카소가 살았던 건물을 체험한다.
위치 기반 문화 콘텐츠
수년에 걸쳐 크게 발전한 증강현실 기술은 공간의 한계를 확장한다는 장점이 있다. 문화 콘텐츠를 전통적인 문화시설에서 벗어나 외부 공간에서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메르세 광장에 대규모의 공공 투자나 새로운 공간의 건설 없이, 수년 전 철거돼버린 피카소 가족의 집을 가상의 레이어로 추가할 수 있게 한 것도 이 기술 덕분이다. 이처럼 위치를 기반한 몰입형 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유형의 문화적 체험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연다.
〈라 메르세 데 피카소〉는 박물관 안의 문화 콘텐츠를 메르세 광장으로 가져온다. 실제로 피카소가 생활했던 정확한 장소이며 현재는 공공장소인 메르세 광장은 피카소의 청소년 시절을 이야기하고 전시하기에 어느 곳보다 이상적인 장소다. 우리는 이 전시가 박물관의 전통적인 큐레이션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신 도시 속 공공 공간에서의 몰입형 체험을 개발하는 데 집중했다.
이번 전시는 기기의 GPS 신호와 주변 건물의 카메라 기반 알고리즘 데이터를 이용해 기기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낼 수 있는 구글의 지리정보 생성자(Geospatial Creator)와 같은 최첨단 기능을 사용했다. 이 기술을 통해 태블릿으로 손쉽게 피카소가 살았던 건물(Carrer de la Mercé 3)의 가상 모델을 재현하고, 추가 센서나 값비싼 인프라 없이 디지털로 재건된 건물 내부를 걸어다니며 몰입형 체험을 할 수 있다.
몰입형 도시 체험
증강현실 기술과 더불어 관람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시리어스 게임(serious game) 방법론을 적용했다. 가령 방문객에게 건물이 철거되던 당시의 도시 정비의 필요성과 비판적 여론을 함께 설명한 뒤, 피카소의 가족이 살았던 건물의 철거를 승인할지 말지 버튼을 누르도록 했다. 철거를 승인하면 1981년 실제로 건물이 무너지는 모습의 사진과 이를 시뮬레이션하는 3D 모델, 그리고 철거 소리가 재생된다. 대부분의 방문객은 화면 앞에서 ‘예’ 또는 ‘아니오’ 버튼을 누르는 것을 주저했고 어떤 이들은 짧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참신한 증강현실 경험을 제공하는 데에는 건축이 큰 몫을 담당했다. 전시는 피카소 가족의 거주지를 표상하는 물리적 외피와 증강현실을 성공적으로 일치시켜 몰입도를 크게 높였다. 제공된 증강현실 경험은 모두 특별히 설계, 제작된 파빌리온 안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증강현실 경험을 구현하는 데에 물리적 구조는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전시를 위한 시각적인 기준 역할을 하면서, 통제된 출입구와 전시 동선을 제공하는 구조물이 필요했다. 파빌리온은 직접 수집한 문서와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피카소가 살았던 건물의 정확한 레이아웃을 따라 설계했다. 또한 목재 제작자의 도움을 받아 조립과 분해가 쉬운 임시 구조물을 제작했다. 외피는 메시로 감싸 외부와의 시각적인 투과성을 유지했는데, 파빌리온을 최대한 투명하고 가볍게 만들어 방문객이 내부에 들어왔을 때 임시적인 공간으로 느끼도록 의도한 것이다. 파빌리온이 메르세 광장의 주인공이 되기보다 증강현실 경험의 배경이 되도록 단순하고 미니멀하게 디자인했다.


미래를 향한 협업
증강현실 기술에는 여전히 많은 한계가 있다. 기술과 실제 응용 간의 격차는 건축가들이 기술의 잠재력을 시도조차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된다. 이번 전시는 한계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개념에서 실행에 이르기까지 증강현실 기술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어떤 것이 가능한지 탐구할 수 있도록 도전을 주고자 했다. 건축가로서 물리적 공간에 새로운 형태의 증강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증강현실 기술은 비건축계의 협업자를 모으고 함께 도전하는 플랫폼 역할을 했다.
피카소의 가족과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메르세 광장과 엮기 위해 예술과 피카소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필요했고, 피카소 박물관과 바르셀로나 시립 아카이브는 초기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예술 및 큐레이터 커뮤니티의 외부인으로서 업계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전시를 위해 저작권과 지적 재산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일 또한 문제가 됐다. 카탈루냐 국립 미술관의 소장품 책임자인 에두아르드 발레스 팔라레스는 문화적, 도시적 관점에서 이 프로젝트가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을 곧바로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피카소 전문가’인 그의 전문적이고 개인적인 네트워크는 프로젝트에 큰 도움이 됐다. 또한 피카소 박물관과 바르셀로나 문화 연구소(ICUB)의 지원으로 전시는 지역의 이목을 끄는 행사가 될 수 있었다. 두 기관의 인정과 신뢰는 이번 전시가 주민과 방문객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데에 중요한 동력이 됐다.
한편 증강현실 콘텐츠를 구축하는 것은 가장 큰 도전 중 하나였다. 증강현실의 인터랙션 수준과 시각화의 고도화에는 수많은 방법이 존재했고, 이는 비전공자로서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콘텐츠의 실행에 있어 위험 요소와 필수적인 요소들 간에 균형을 맞추는 일은 콘텐츠의 구축 비용과 직접적으로 결부됐다. 우리는 초기 단계부터 맞춤형으로 제작된 화려한 UI를 구축하기보다는 전시의 내러티브에 집중하기로 결정했고, 기존에 상용화되어 있는 증강현실 플랫폼을 사용하기로 타협했다. 이에 따라 앱 개발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크게 줄이고 잠재적인 버그와 결함을 피할 수 있었지만, 증강현실 기술의 매우 기초적인 기능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시는 일회성 행사로 계획되지 않았다. 위치 기반 몰입형 체험을 통해 한 장소 위에 여러 레이어의 경험이 계속 쌓아지는 ‘실험’을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지역의 대성당, 대학 행정부, 예술가 협회 및 메르세 광장 근처의 기업들을 모아 협력 관계를 맺었고, 주민과 방문객 모두로부터 도시 속 공공 공간이 꼭 필요로 했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전시에 참여한 개개인은 메르세 광장을 지나칠 때마다 그들만의 유일무이한 체험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도시 경험을 더욱 많이 원한다는 것이다. 현재 〈라 메르세 데 피카소〉의 경험을 바탕으로 2024년의 후속 전시로 바르셀로나 근교를 배회했던 피카소의 어린 시절 친구들을 소개하는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방문객이 증강현실 화면에서 철거 승인 버튼을 누르면 1981년 실제로 건물이 무너지는 모습의 사진과 시뮬레이션이 재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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