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4년 5월호 (통권 678호)

호숫가의 집(2023)
우리는 하나의 건축적 주제를 정해두고 몇 십 년씩 정진할 생각이 없다. 평생에 걸쳐 올곧은 작품 세계를 이어간 건축가도 있으나, 30대에서 60대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의 변신을 거듭하며 지속적으로 의미 있는 작업을 만든 이들도 있지 않던가. 우리는 후자가 되고 싶다. 그것이 더 흥미롭기 때문이다.
이번에 「SPACE(공간)」를 통해 소개할 작업들은 2019년에서 2022년 사이에 설계되어 2023년까지 지어진 것들이다. 당연하게도 이 작업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추출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이 건물들을 설계하는 동안 상대적으로 많이 언급했던 키워드를 추려볼 수는 있었는데 바로 ‘시간, 영역, 기술’이었다.

화이트 온 화이트(2021)의 구조 모형
시간
주로 개인 건축주의 건물을 많이 설계했던 우리가 건축에 대한 단서를 수집하기 위해 했던 일은 이런 날과 저런 날, 아침과 저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었다. 건물이 완성된 후 의뢰인으로부터 “요즘은 아침마다 거실 앞 테라스에 앉아 남편과 커피를 마시곤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뿌듯한 일이었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건축주의 일상보다 더 깊은 것으로 확장되었는데, 이는 건물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 때문만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는 외벽의 오염을 목격하고 속상한 적도 있었고, 세입자가 바뀌면서 나타난 예기치 못한 상황을 전해 듣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이 축적되면서 우리는 당장 건물 내부에서 일어날 행동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속도로 낡을 외장재에 대해 생각하거나 완공 후 수년이 지나 가족의 양상이 바뀌는 상황을 가정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2019년 하반기부터 다가구·다세대 주택 프로젝트 세 건을 동시에 설계했다. 수익성에 민감한 이 프로젝트들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집을 원하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지역에 따라 대상으로 생각되는 주요 사용자가 다르기도 했고, 한 프로젝트의 정답이 다른 프로젝트에서는 오답일 수 있음을 몸소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확산되면서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할 수 없었던 마스크 대란, 자가격리, 비대면 수업 따위를 목격하며 현재의 상황은 현재일 뿐, 미래의 주거에 대해 완전히 예측할 수 없다는 것만큼은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실내 내력벽을 최소화하고 철거와 수정이 간편한 비내력 건식 벽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구조 설계자와 내력벽이 최소화된 구조 계획에 대해 협의하고, 이들 벽체에 방화, 방수, 차음 성능을 부여하는 일은 우리 설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썸 클리어 스토리즈(2022)의 구조 모형
영역
은퇴와 함께 서울을 떠나기로 한 부부를 위한 단독주택인 호숫가의 집(2023)에서도 건축주의 일과에 대한 고민은 설계 기간 내내 중요한 화두였다. 앞으로는 원예인처럼 꽃을 가꾸며 살고 싶다는 건축주의 이야기를 듣고는 여름 땡볕과의 사투, 겨울철 눈 묻은 장화의 질척거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간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잠시 해를 피할 수 있는 그늘, 신발을 적시지 않고 눈 쌓인 호숫가를 바라볼 수 있는 반외부 공간이었다. 집의 실내 공간과 통제되지 않은 환경 사이에 만들어진 중간 영역은 이 집의 가장 필수적인 공간이 되었다. 이 완충 영역 덕분에 이 집은 남측의 앞마당과 호수, 북측의 텃밭, 서측의 주차 공간과 더 부드럽게 연결된다.
호숫가의 집에서처럼 우리의 생각은 좋은 방, 좋은 건물을 만드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건물 주변에 영역을 만드는 것으로 확장되곤 한다. 우리의 첫 공공건축물인 이 도시의 유치원(2022)은 이런 생각으로 설계공모에 참가해 당선된 프로젝트다. 부지는 아파트 재개발이 한창인 흑석동에 위치해 있는데, 대지 바로 맞은편 구역만큼은 개발이 확정되지 않아 전면 도로는 좁고, 정비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지 경계 안쪽으로는 평평한 초등학교의 운동장이 조성되어 있어, 유치원의 계획 부지는 도로와 단차가 8m까지 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건물이 들어서면서 이러한 곤란한 경계 조건이 해소되기를 바랐다. 길 쪽(동측)에는 학부모와 동네 주민들이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야외 공간을 제공하고, 초등학교 쪽(서측)으로는 초등학생들이 땡볕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캐노피 공간이 형성되도록 계획했다. 유치원 안의 어린이와 선생님에게 편안한 일상을 선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외피와 대지 경계를 넘어 주변까지 좋은 영향력이 퍼질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유치원 준공 이후 초등학교와의 경계에 철제 울타리가 쳐지면서 우리의 의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어느 가정의 형제 자매가 다닐지도 모르는 한 필지 내의 유치원과 초등학교 사이에 울타리 대신 감싸주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너무 순진했던 것일까. 언젠가 인식이 변하고 관계가 변해 울타리가 허물어지고 아이들이 좀 더 넓은 길을 뛰어다니게 되는 상상을 해본다.

웜 앤 쿨(2021)의 구조 모형
기술
많은 프로젝트에서 구조는 우리가 시간과 영역에 대해 고민한 것을 실현해주는 막강하고 본질적인 도구가 되었다. 또한 재료의 성질이나 부재의 시공성에 대한 고민은 우리의 생각을 우아한 모습으로 표현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일원동 다세대주택인 웜 앤 쿨(2021)에서의 고민은 좁은 대지에서 불편하지 않은 일상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됐다. 차에 타고 내릴 때마다 기둥이 걸리적거리는 필로티 주차장은 두고 싶지 않았고, 볼륨은 작아도 즐거운 집을 만들고 싶었다.
결국 이 건물은 양방향으로 3m가 넘는 캔틸레버를 가지게 되었고 2, 3층의 외벽을 트러스로 작동하게 했다. 겨울철 동파가 발생할 수 있는 다세대주택 필로티 천장의 고질적 문제를 피하고자 2층 세대의 화장실에는 벽부형 변기와 층상 배관을 적용했고, 그 결과 캔틸레버형으로 돌출된 주차장의 천장 면을 연속적인 콘크리트 면으로 노출할 수 있었다.
호숫가 집의 외장재로는 목재와 석재가 사용됐다. 자연에 다가가고자 짓는 집이기에 도시적 이미지보다는 자연재라는 느낌이 나는 재료를 쓰고 싶었다. 목재가 가진 문제는 한국의 기후 환경에서 낡아가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점이었다. 목재의 노후를 유발하는 주요 요인은 태양과 빗물이므로 목재가 이들에 노출되는 빈도를 통제하고자 했다. 처마가 있어 빛이 덜 들고 빗물이 닿지 않는 부분에는 목재를 사용하되, 처마가 없는 부분과 빗물이 튈 수밖에 없는 벽체 하단에는 기후에 따른 변형이 적은 석재를 사용했다. 이 집 테두리에 덧대어진 처마 요소와 바닥의 기울기 등은 해를 가리고 빗물을 흘려보내기 위한 전략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기술적 고려를 통해 목재와 석재가 균형감 있게 낡아가는 모습을 만들고자 했다.
성북동에 위치한 단독주택인 썸 클리어 스토리즈(2022)는 시간, 영역, 기술에 대한 생각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대지는 남측으로는 도로를, 북측으로는 급경사의 언덕을 면하고 있는데, 도로 가까이 단순한 사각형의 집이 들어서면서 대지에는 가족들을 위한 보호된 안마당이 형성됐다. 어린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바뀌게 될 집의 평면, 융통성 있는 내부 구성을 가능케 하는 구조적 해법은 이 집의 주요한 디자인 인자로 남았다.

호숫가의 집, 해와 비가 닿는 곳 렌더링 이미지
주제들
앞서 말했듯 우리가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시간, 영역, 기술’을 화두로 삼겠다고 다짐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건축주의 상황이나 대지의 조건 등을 바탕으로 더 나은 것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진행했을 뿐인데, 그렇게 작업한 시간을 돌이켜볼 때 더 자주 입에 올리고 떠올렸던 단어를 추렸다는 표현이 사실에 더 가깝다. 앞으로 우리의 작업에서 다른 무엇이 중대한 관심사가 될지는 명확하지 않으니, 현시점에서 섣부른 예상은 하지 않기로 한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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