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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에 관한 보이지 않는 이야기: 2024 서펜타인 파빌리온 ‘군도의 여백’

김정은 편집장
사진
이완 반(별도표기 외)
자료제공
서펜타인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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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공간)」 2024년 7월호 (통권 680호) 

 

지난 6월 5일, 조민석(매스스터디스 대표)의 서펜타인 파빌리온 ‘군도의 여백(Archipelagic Void)’이 공개됐다. 올해 1월 조민석이 한국 건축가 최초로 서펜타인 파빌리온의 건축가로 초대됐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SPACE(공간)」 676호(2024년 3월호)에서는 ‘매스스터디스의 건축과 파빌리온’이라는 주제로 군도의 여백이 탄생하기까지 여정을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이번 호에서는 역대 서펜타인 파빌리온과는 다른 접근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군도의 여백을 방문한 후기와 국내외 건축계의 평가를 갈무리해 전한다. 

 

2024 서펜타인 파빌리온 ‘군도의 여백’ 

 

파빌리온은 중앙의 빈 공간을 중심으로 구조물 다섯 개가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형태인데, 기존 보행 네트워크를 섬세하게 분석한 구성이다. ©Kim Jeoungeun

 

런던 하이드파크 서쪽으로 연결되는 켄싱턴 가든스는 오늘날 공동체와 공간의 관계에 대해 논하기에 적절한 장소다. 헨리 8세의 사냥터로 조성되었다가 대중에게 개방된 켄싱턴 가든스의 역사는 귀족들의 정원이 시민사회의 성장으로 공원으로 개방되는 서구 공공 공간의 출발을 선도했던 사례 중 하나다. 즉 사회의 중심 권력이 시민사회로 이동하는 변화를 공간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장소인 셈이다.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2000년 미술관 후원금 마련 파티를 위해 켄싱턴 가든스에 임시 천막 구조물을 설치했던 자하 하디드의 파빌리온이 주목받으면서 연례행사로 자리 잡는다. 21세기와 함께 시작된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이후 건축가와 미술관이라는 기관이 만나 다양한 사회ㆍ건축적 실험을 선보이는 여러 흐름에 중요한 영감을 준다. 

존홍(서울대학교 교수)은 「SPACE」 676호에서 파빌리온 건축이란 “건축적 선언, 새로운 기술, 새로운 사회문화적 조건을 구현하고 시험하는 장”으로 기능해왔다며, ‘군도의 여백’이라는 이름으로 올해 선보이게 될 조민석의 파빌리온이 대부분 ‘오브제’로 응고되기 마련인 기존 파빌리온에 반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개념을 매개하는 안티-파빌리온이라고 해석했다. 지난 6월 스물세 번째 파빌리온으로 공개된 군도의 여백은 이러한 대지(공원)와 이전 스물두 개 파빌리온의 역사를 분석하는 것을 설계의 시작으로 삼고 오늘날 공동체와 공공 공간, 건축에 대한 생각을 펼쳐낸다.  

 

파빌리온의 북쪽에 자리한 ‘읽지 않은 책들의 도서관’은 아티스트 히만 청과 아키비스트 르네 슈탈이 함께 기획했다. 

 

6월 7일 열린 ‘조민석과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의 대화’ ©Kim Jeoungeun

 

다양한 프로그램과 풍부한 내러티브

서펜타인 파빌리온을 처음 찾았을 때, 무성한 나무 사이에 가려진 파빌리온은 한눈에 파악되지 않았다. 드넓은 풍경식 정원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오브제로 놓인 파빌리온이 아니라, 경계가 흐릿한 풍경이 군도의 여백을 본 첫인상이었다. (사실 처음 렌더링 이미지 두 장이 공개되었을 때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운 형태에 의구심을 표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보이드를 포함한 건축면적이 295m2 정도인 변형된 별(star) 모양의 구조물은 다섯 개 섬 - 팔, 촉수, 손가락 등으로 묘사되는 - 으로 이뤄져 있다. 중앙의 여백(void) ‘마당’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배열된 다섯 개 구조물은 일명 ‘콘텐츠 기계(content machine)’로 갤러리, 오디토리움, 도서관, 티하우스, 플레이타워라는 명확한 프로그램을 부여받았다. 최초 공개된 조감도를 확인할 때는 각각의 섬에 어떤 이름이나 프로그램이 부여되어 있든지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임시 구조물로 태어나서 5개월이 지나면 어디론가 이동하게 되는 이 파빌리온의 운명에 따라, 조민석은 구조물 다섯 개를 총 120가지 선택지로 또 다른 미지의 장소에 대응하도록 고안했기 때문에 특정 프로그램과 구조물의 결합 자체가 중요하다고 보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빌리온이 공개된 이후 쏟아진 기사 중에 이번 서펜타인 파빌리온이 설파하는 시대정신을 두고 “건축 원리를 결정하는 파사드나 유형(topology)보다는 프로그램의 매혹적인 부활”▼1이라는 평가가 눈에 띈다. 파빌리온 한 개이지만 다섯 개 파빌리온이자, 그 사이 공간까지 합치면 11개 공간으로 구성된 군도의 여백에서 프로그램은 대화와 호기심을 촉발하는 역할을 한다. 과거의 서펜타인 파빌리온들이 느슨한 목적을 가진 넓고 단일한 공간을 만들었던 것과는 비교된다. 조민석은 이를 (다분히 외신을 염두에 둔 표현이겠지만) ‘한국식 밥상’에 비유한다.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제시되지만, 각자의 취향과 선택에 따라 다른 코스를 취하게 되는 방식 말이다. 다양한 선택권을 주는 것이 다양한 사람들을 모으고, 재방문을 유도하는 실험적 방법이라는 의미다. 조민석은 각 파빌리온을 두고 한국의 문화와 건축뿐 아니라 세계의 여러 선례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영감의 원천을 설명하고 여러 겹의 내러티브를 쌓아 스토리텔링에 성공한 듯 보인다.

파빌리온의 주 출입 공간인 갤러리에는 (조민석과 오랫동안 교류해왔던) 뮤직 아티스트 장영규의 6채널 사운드 작업 ‘버들은(The Willow is)’이 흘러나오는데, 가을이 되면 ‘월정명(Moonlight)’으로 바뀌면서, 그 계절에만 느낄 수 있는 공감각적 분위기를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읽지 않은 책들의 도서관(The Library of Unread Books)’은 서펜타인 프로젝트의 아티스틱 디렉터인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소개로 아티스트 히만 청과 아키비스트 르네 슈탈이 함께 기획했다. 불특정 다수가 방문하는 공원과 여러 연령과 계층을 끌어들이는 도서관은 꽤 어울리는 조합이다. 조민석은 이 도서관 프로그램이 최근 서울의 공원에 들어선 작은 도서관들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전한다.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가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만들며 오염된 도시의 해독제가 될 것이라고 했듯이, 조민석 역시 “디지털로 지친 사회에서 도서관이 해독제” 역할을 할 것이며, 특히 시민들의 기부로 점차 자라나게 될 이 작은 도서관의 아카이브는 ‘참여’의 의미를 실천한다고 설명한다. 

파빌리온의 동쪽에 자리한 티하우스는 제임스 그레이 웨스트가 설계한 서펜타인 사우스 건물이 1934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찻집으로 기능했던 역사를 상기시킨다. 역대 서펜타인 파빌리온에는 항상 차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공간을 점유하고 이름을 부여받은 것은 처음이다.

서쪽의 오디토리움은 말 그대로 각종 공연과 토크 프로그램을 소화하기 위한 구조물이다. 조민석의 초기안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이 이 오디토리움으로, 주최 측의 요청에 따라 20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규모가 조정되었다고 한다. 

다섯 개 섬 가운데 가장 높은 구조물인 플레이타워에는 기어오를 수 있는 오렌지색 그물망이 걸려 있는데, 서펜타인 파빌리온 최초로 들어선 놀이 구조물이다. 6.9m 높이의 이 타워는 인스타그램의 필터를 연상시키는 오디토리움의 핑크빛 폴리카보네이트 창문과 함께 서펜타인 갤러리의 엄숙함을 덜어내고 이곳에 장난스러운 뉘앙스를 남겨둔다.

 

파빌리온은 대지의 완만한 경사에 주추(프리캐스트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대응하고 있으며 이 위에 얹힌 목제 보는 높낮이가 다른 벤치로 변주되고, 그 위로 목구조가 연결된다.  

 

서쪽의 오디토리움은 각종 공연과 토크 프로그램을 소화하기 위한 다섯 개 섬 가운데 가장 큰 구조물이다. 내부의 벽으로 벤치가 만들어져 있다. 

 

무수한 선택의 여지, 감각에 호소하는 경험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는 이 파빌리온이 한국의 전통건축과 국제적인 문법의 융합이라고 해석한다. 이번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대지의 완만한 경사에 주추(프리캐스트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대응하고 있으며 이 위에 얹힌 목제 보는 높낮이가 다른 벤치로 변주되고, 그 위로 목구조가 연결된다. 이러한 구축 방식과 재료에 대해 조민석은 한국의 전통 정자나 한옥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고트프리트 젬퍼의 건축의 4요소를 소환하기도 하고, 영국의 곡물 창고를 찾아내기도 하는 식이다. 

이번 서펜타인 파빌리온의 또 다른 특징은 다양한 감각적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신체 활동을 유도하는 플레이타워뿐만 아니라 촉각적인 경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공학목재가 아니라 천연 목재가 사용됐다고 한다. 감각에 호소하는 방식에 관해, 조민석은 21세기가 디지털 세상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많은 것들이 더더욱 시각 중심적인 문화의 지배하에 들어서게 되었음에도 오감으로 느끼는 건축만은 다운로드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생각의 출발에는 그가 2005년 알바루 시자와 에두아르두 소투 드 모라, 세실 발몽이 협업한 서펜타인 파빌리온을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방문한 파빌리온에서는 진한 흙냄새가 풍겼는데, 굉장히 고전적인 순간으로 기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펜타인 파빌리온에 대한 의뢰를 받았을 때, 가장 촉각적이라고 생각하는 전통적인 참조 유형으로 돌아갔다. 그는 신발을 벗고 온돌 바닥을 껴안고 잠을 청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가 대단히 촉각적이며, 잠자는 방이 식사 공간이 되는 재프로그램도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각기 다른 프로그램, 크기와 높이, 색깔을 가진 다섯 개 섬과 그 사이의 여백은 중앙의 원형 마당으로 연결되는데, 처마와 지붕이 한정하는 하늘의 풍경이, 왜곡된 시각을 유도하는 각 파빌리온의 평행사변형 형태가, 그 사이의 여백이, 켄싱턴 가든스의 초목과 교호하며 다채로운 장면이 연속된다. 특히 오프닝을 기념해 열린 여러 행사를 지켜보며 흥미로웠던 부분은 주최 측은 다양한 방식으로 연단과 객석을 조합하고,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파빌리온 안팎을 넘나들며 벤치와 공간을 점유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평범하지만 다양한 삶의 한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옴니버스 영화 같은 감동이 있다. 

조민석은 무수한 선택지를 제공하는 이 50m2 면적의 마당이 그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건축을 통해 생성되는 공동체를 포용한다고 설명한다. 여러 가지 일들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을 만큼 적절한 사회적 거리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새로운 관계에 불을 붙일 수 있을 만큼 친밀한 거리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보이지 않는 이야기로 가득 찬 마당’이라는 오브리스트의 표현처럼, 군도의 여백은 눈길을 사로잡는 형태보다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성되는 관계의 가능성을 품은 여백을 만들어내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이는 조민석이 원불교 원남교당(2023)에서 인상적으로 보여주었던 관계를 조율하는 수단으로서의 건축, 무수한 시나리오를 제공하는 건축과 공명하며 매스스터디스 건축의 한 계보를 이어간다. 

올해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서펜타인 파빌리온의 작가로 조민석이 선정된 배경에는, 조민석과 그가 이끄는 매스스터디스의 건축적 성취가 있었겠지만, 또 상당 부분은 영화, 음악, 음식, 기술 등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해 최근 높아진 관심에 힘입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이 파빌리온이 가져올 반향은 좀 더 지켜보아야겠지만 군도의 여백이 한국과 세계의 건축 문화를 두루 경유하며 추구한 보이지 않는 건축의 가능성에 대한 기록으로 남을 것은 분명하다.​ 

 

조민석은 무수한 선택지를 제공하는 이 50m2 면적의 마당이 여러 가지 일들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을 만큼 적절한 사회적 거리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새로운 관계에 불을 붙일 수 있을 만큼 친밀한 거리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월간 「SPACE(공간)」 680호(2024년 07월호) 지면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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