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4년 12월호 (통권 685호)
지난 10월 18일, 「SPACE(공간)」는 백진(서울대학교 교수)의 초청으로 2024년 프리츠커상 수상자 야마모토 리켄이 설계한 판교 하우징에 다녀왔다. 판교 하우징은 그가 주창한 지역사회권 개념을 처음으로 담아낸 공동주택이다. 판교 하우징이 지어진 지 어언 14년, 야마모토가 이러한 주거 실험을 통해 달성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또 주민들은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앞선 취재기에서는 야마모토의 ‘지역사회권’ 개념을 중심으로 판교 하우징 답사 현장을 스케치한다. 이어 백진, 한상우(전남대학교 강사)는 판교 하우징의 투명한 현관을 심층적으로 분석해, 야마모토가 이루고자 한 혁신을 짚어낸다.
①첫 번째 지역사회권 실험의 여정
②이유 있는 투명함: 현관방과 마당의 은유적 재현
©Kim Bokyoung
이유 있는 투명함: 현관방과 마당의 은유적 재현
주택의 본성: 에토스의 배양 판교
하우징은 투명한 유리문으로 처리된 현관으로 악명높다. 이런 특이한 현관은 ‘지역사회권’을 주창한 야마모토 리켄의 공동주택에 사용하는 대표적인 언어이다. 지역사회권과 투명한 현관홀로 처리된 특이한 문지방, 이 양자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야마모토는 외부 세계와 주택 양자 사이에는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여 둘을 매개하는 장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본래 주택은 현대인이 떠올리는 것처럼 내밀한 사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곳만은 아니었다.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반대로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애매모호한 활동을 주재하는 공간이 주택에 담겨 있었다. 야마모토가 ‘시키(閾)’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국말로 하면 ‘문지방(門地枋)’ 또는 방이라는 말을 붙여 ‘문지방방(門地枋房)’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대 그리스에서 심포지엄이 열린 무대인 오이코스(oikos) 속 안드론(andron)이 시키에 해당한다. 한국인에게 친숙한 마당 역시 문지방에 해당한다. 절기별로 가사와 생산활동이 벌어지는 곳이자 제사, 장례식, 결혼식 등이 열리는 의례 공간이기도 했다. 마당에서 벌어지는 여러 상황은 개인이나 가족만의 내밀한 것이 아니라 집단적 행사이기에 타인이 자연스레 담장 안으로 들어와 참여했다. 야마모토가 주창한 지역사회권을 굳이 복잡한 이론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덴마크의 속담 하나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간다. “아이의 부모는 두 명이 아니라 백 명이다”라는 속담이다.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온 동네가 필요하다”라는 속담도 마찬가지이다. 지속 가능한 사회의 기초단위인 소규모 공동체의 활성화를 지향하는 지역사회권은 내밀한 사적 공간을 적대시하지 않는다. 야마모토는 내밀한 사적 공간과 개방적인 공적 공간 사이에 다양한 조율이 가능한 다층적 구조를 짠다. 내밀함과 개방성을 동시에 살리는 길이다. 양파 껍질 같은 깊이감을 갖춘 구성이다. 다층적 구조가 작동하지 않을 때 이웃과 동네에 대한 애착이 사라지고 도시의 익명성 뒤로 숨어들어 만사를 공적인 제도로 풀려는 태도가 팽배해진다. 다층적 구조를 만들어내는 핵심적 요소가 문지방이다. 문지방 덕에 주택은 타자와 만나 조율하며 찾아가는 적정한 균형을 의미하는 에토스(윤리의 어원)의 배양지가 된다. 판교 하우징의 투명한 현관홀은 에토스의 감각을 회복하도록 돕는 건축가의 묘안인 것이다.
©Kim Jeoungeun
투명한 현관홀과 신종 마당
판교 하우징은 집합주택에서도 마당 같은 문지방 공간을 회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곳에는 2층에 자리한 커먼데크 이외에 숨겨진 마당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투명한 현관방이다. 실내 공간을 마당이라 지칭하는 데 거부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여느 마당은 가로와 대문을 거치면 그 전용을 드러낸다. 심도가 가장 얕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마당은 부엌, 기단, 디딤돌, 툇마루, 대청마루, 사랑채 등 인접 요소와의 관계망 속에 자리한다. 가족과 공동체의 번영과 평화, 초대와 만남, 이별과 재회, 개방과 포용을 넘나드는 삶의 드라마가 꽃피는 곳이다. 하지만 마당은 근대를 지나는 동안 소실되고 만다. 문화주택, 도시한옥, 영단주택, 공영주택, 다가구주택, 다세대주택, 아파트 등 다양한 유형의 주택과 내밀한 주거 평면의 등장으로 마당은 여유 있는 단독주택의 전유물로 그리고 성벽 같은 담장 너머에 존재하는 은밀한 영역으로 위상이 바뀌었다. 현관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현관은 근대주택이 대량으로 공급되는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공간이다.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하고 주택 설계의 불문율처럼 기계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현관의 등장으로 ‘가로-(마당-기단-디딤돌-대청마루)-방’으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가로-(코어-현관-복도)-방’으로 배열이 바뀌었다. 현관문을 경계로 내부와 외부, 사적 생활과 공적 생활이 뚜렷이 나뉜다. 현관의 역할도 단순히 신발을 벗어놓는 공간 정도로 여겨진다. 종전의 마당과 그 언저리처럼 일상을 담아내는 문지방 공간이 주택에서 소실된 것이다. 판교 하우징은 현관문을 두고 벌어지는 내부와 외부의 이항 대립에 의미 있는 균열을 낸다. 먼저 현관을 확 넓혀 방으로 만들었다. 거주민이 취향에 따라 서재, 응접실, 아틀리에, 갤러리, 미술학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바닥을 돌로 마감하여 상황에 따라 신발을 신고 내부로 들어오는 것도 가능하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사면을 투명한 유리로 마감하여 바깥의 커먼데크와 주택 내부를 시각적으로 연결한다. 현관방은 실내이지만 마당처럼 준사적 또는 준공적 활동이 전개되는 신종 마당인 것이다. 야마모토의 ‘마당 같은 현관’은 형식논리에 사로잡혀 테라스나 발코니를 마당이라 고집하는 즉물적 재현도 아니고 현학적 해석으로 빚어놓은 관념적 유희의 산물도 아니다. 투명한 유리를 통한 이웃 주민 사이의 시각적 교차, 그리고 현관방에서 벌어지는 경제, 생산, 사교 활동은 대문을 지나면 나타나던 마당의 변신이다. 공동의 삶의 감각인 일상적 교류와 만남의 촉발을 자연스레 회복하도록 한다. 판교 하우징의 현관방은 낭만적 의미를 쏟아부은 ‘노스탤지어적 표상’이 아니라 일상의 삶을 지원하고 실천하는 ‘은유적 재현’이다.
수용력과 지속가능성
판교 하우징의 특별한 점은 유닛마다 실로 다채로운 일상이 펼쳐진다는 점이다. 현관방 주변으로 목재 데크를 깔고 테이블, 의자, 화분을 두어 손님을 맞는 응접실이나 이벤트 공간으로 활용하고, 자녀의 독립 이후 여분의 공간을 임대하기 위해 또 다른 현관문을 내어 위아래 층의 동선을 분리하고, 높은 층고를 활용해 다락을 두어 어린 자녀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 현관 뒤편 서둘산 자락과 맞닿은 곳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함께 불멍을 때리기도 한다. 변화하는 생활의 패턴을 주거가 거부하지 않고 넉넉하게 받아주는 ‘수용력(capacity)’을 가지고 있다. 마감재나 창호를 바꾸고 싶다거나 공간을 새로 구획하고 싶다거나 그림을 새로 걸고 싶다거나, 주택에 조금씩 변화를 주고 싶을 때마다 닿지 않는 스타 건축가의 기별을 기다리며 노심초사하지 않는다. 건축가가 그려놓은 그림에 그들의 삶과 생활을 억지로 욱여넣지 않고 각자 형편과 양상에 맞추어 공간을 재구성하며 살아간다. 수용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투명한 현관방이 일방적 ‘강요’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조건’으로 다가온다. 조건은 어떻게 해석을 내리느냐에 따라 의미가 반전된다. 이웃이 서로 만나 집과 집 사이의 공간을 삼분할하고 가운데 부분은 통로로 빼놓되 나머지는 데크를 깔고 화분을 놓고 옥외용 테이블과 의자를 내어놓기로 약속을 한다. 진득한 마음으로 데크의 너비와 폭, 블라인드와 어닝의 높이와 깊이, 화분의 크기와 수 같은 공간 요소를 조금씩 세밀하게 수정하며 적정한 거주의 방식을 체득해나간다. 조건의 해석을 통해 ‘거리’를 조율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이 개입하고 살 만한 동네로 완성이 된다. 은밀히 훔쳐보는 관음증적 병폐가 아니라 ‘이맘때면 아이를 데리러 나가던 앞집 아저씨가 오늘은 안 나가네. 무슨 일이 있나?’와 같은 지역사회권의 싹이 튼다. 이웃과의 교류를 통해 거주의 방식을 체득하는 것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만남과 조율의 감각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강요가 아니라 조건으로 주어진 공간을 매개로 고립된 개인이 아닌 공존과 공동의 이득을 위한 대화와 타협의 기회가 만들어진다. 에토스의 감각이 배양되는 것이다. 판교 하우징의 투명한 현관홀과 다양한 사이 공간이 지니는 ‘여백의 수용력’ 덕분에 뜻하지 않은 교류와 소통, 초대와 만남이 촉발되었다. 건축이 아르누보의 강요도 아니고 미니멀리즘의 텅 빈 침묵도 아닌 실천하는 수용력으로 다가올 때, 공동의 일상을 일구어내는 데 기여하는 윤리의 지평으로 올라선다.
현관의 혁신과 신종 마당
야마모토의 투명한 현관을 향한 우려 섞인 비판이 일견 타당한 지점도 있다. 하지만 절박한 것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과 프라이버시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당연시하는 현대 주택의 재평가이다. 육아의 고통, 저출산, 행복도 저하, 생산성 저하 등은 모두 공동주거 계획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야마모토의 말은 일리가 있다. 공동주거는 도시에 지어지는 수많은 ‘시설(institution)’ 중 하나일 뿐이라는 왜곡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동주거는 장기적으로 효율성을 담보하는 지속 가능한 사회를 일구어내는 가장 근본적인 시설이며 혁신의 대상임을 인지해야 한다. 공동주거가 사회의 모든 병폐를 당장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와 타인을 향한 무심함, 관음증, 배타, 감시의 시선을 떨쳐내고 대화의 상대로 재발견하며 서로 조율을 시도하는 토대와 계기를 제공해 줄 수 있다. 그제야 비로소 지역사회권이 그리는 공동의 연합과 연대의 삶을 향한 첫걸음을 다시 뗄 수 있다. “아이의 부모는 두 명이 아니라 백 명”이 되는 소규모 공동체의 활성화를 꿈꿀 수 있다. 야마모토가 집주인도 손님도 서로 부담 없이 수시로 만날 수 있는 문지방, 즉 현관방이라는 신종 마당을 만들어낸 이유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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