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4년 11월호 (통권 684호)
오피니언에서는 대한민국에서 공공 문화시설의 설계자와 설계안을 선정하는 주된 방식인 설계공모를 중심으로 건축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했다. 답변은 의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일부 발췌 및 편집하여 수록했다.
참여자
김아연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김현수 이소우건축사사무소 공동대표
남상문 날곳건축사사무소 대표
맹필수 서울대학교 교수
윤근주 일구구공도시건축 건축사사무소 공동대표
이정훈 조호건축사사무소 대표
이치훈 건축사사무소 에스오에이 파트너
임동우 홍익대학교 교수
임성훈 동명대학교 교수
조남호 솔토지빈건축사사무소 대표
조재원 공일스튜디오 대표
조항만 서울대학교 교수
황두진 황두진건축사사무소 대표
Q5.
오늘날 공공 문화 공간을 설계할 때 좀 더 가치를 두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김아연 도시 혹은 건축 관련 분야 자문회의에 갈 때마다 지구적 위기의식이 없다는 사실에 자주 놀란다. 기후위기는 현실이며 우리 시대 문화는 지구적 이슈와 분리될 수 없다. 공간을 다루는 모든 분야에서 지속 가능한 대안적 문화 담론을 엄중하게 고민해야 한다.
조재원 통계치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올여름을 지나면서, 국내와 전 세계 곳곳에서의 홍수, 폭염, 산불 등 기후위기와 관련된 재난과 재해 뉴스를 매일매일 접하고 있다. 한 필지의 건축계획은, 더구나 공공 문화 공간의 건축 기획과 계획은 10년, 100년 후의 도시에 대한 구상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기본 원칙과 태도는 장소와 프로그램을 불문하고 모든 공공 건축, 특히 공공 문화 공간 기획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단위 건물로서만이 아니라 도시에서 새로 지어야 하는 공공 문화 공간의 필요성, 타당성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도시 전환 논의의 장에서 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이루어진 서울의 공공 문화 공간 공모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마치 예비된 제2의 행성이 있는 것처럼 태평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가.
맹필수 (기후위기와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공모 이전부터 지역에서의 도서관의 의미, 입지, 운영 주체의 역할과 운영 방식에 대해서 지역주민과 지자체가 충분히 논의하고 기존의 건축물을 최대한 지켜 지은 후, 지역공동체가 계속해서 운영하며 가꾸어가고 있는 구산동도서관마을과 같은 사례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이치훈 공공이 생산하는 도시 건축 공간의 핵심적인 가치는 그것이 ‘모두를 위해’ 존재하게 된다는 점이다. 건축의 공공성은 건축물 그 자체만으로 달성될 수는 없지만 기본적인 조건으로서 작동해야 한다. ‘모두를 위한 건축’은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건축에 어떤 철학적 방향성을 부여한다. 시애틀 라이브러리는 ‘모두를 위한 도서관’이라는 사업의 철학을 구현하기 위해 건축의 디자인적 전략이 잘 수립된 사례로 꼽힌다.
남상문 공공 문화 공간이나 도심 공원, 광장, 가로 등은 도시경관과 정체성에 큰 영향을 주는 도시 조직이기 때문에 연속성이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서울시에서 추진 중인 세운상가 철거, 돈의문 박물관마을 철거 등을 보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론화 과정 없이 즉흥적으로 정책이 결정되면서 헐고 다시 짓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자원 낭비와 환경오염 문제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도시가 연속성을 상실하며 파편화, 익명화된다는 문제가 있다. 이제는 공공 건축의 기획에서부터 설계, 건설, 유지관리, 변경, 처분 등에 이르는 전 과정이 성숙한 시민사회와 수준 높은 건축 문화를 바탕으로 민주적으로 진행됨과 동시에 건물이 사회 변화를 포용하며 성장하고 진화하며 오랜 세월 동안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
조항만 많은 시민문화회관들이 지금도 텅 비어 있다. 계속해서 양질의 문화 콘텐츠를 기획하고 공급하기에는 인력도 예산도 부족하다. 이것을 보충할 수 있는 것이 건축물 자체의 높은 퀄리티다.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세계의 명소들은 일시적인 프로그램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도 문화적인 허기를 채워줄 수 있다. 역사, 전통, 미학과 전설, 건축과 기술의 높은 수준, 그 공간이 만들어지기까지 들어간 재화와 인력 등이 그것이다. 완성까지 200~300년은 족히 걸렸던 여러 유럽의 성당들, 알함브라 궁전과 같이 시대의 건축과 예술의 정수를 모아놓은 곳, 뉴욕의 센트럴파크, 리틀 아일랜드, 베슬(Vessel) 등 최고의 문화적인 공간은 콘텐츠에 관계없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Q6.
많은 설계공모가 ‘상징적’이고 ‘창의적’인 건축을 표방한다. 그렇다면 현재 설계공모의 관행이나 시스템은 그러한 건축을 생산할 수 있도록 운영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인가?
김현수 공모에 당선되기 위한 설계안에 그치지 않고 독창적이고 완성도 높은 건축, 창의적인 건축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실험적인 공법과 새로운 재료를 검토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현장에서 목업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일정 부분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공모 사업 기간에 반영해야 한다. 하지만 주어진 기간은 기본적인 지침을 따르기에도 빠듯하며,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 도전한다면,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김아연 운영에 대한 재정적, 행정적 지원 체계에 대한 고민 없이 설계공모부터 발주되는 것은 큰 문제다. 설계공모 단계에서 운영자나 이용자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설계공모가 지나치게 건축 중심이라는 점이다. 동시대 새로운 공간 창출은 분야 간 협업을 통해 칸막이 상상력을 뛰어넘어야 하는데, 응모자의 자격이 건축사로 제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경을 포함한 ‘협력업체’는 이름 없이 그림자노동을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프로젝트 특성에 따라 건축사와 관련 분야의 공동응모가 가능하도록 기획 단계부터 자격과 크레딧 문제를 명확히 해야 한다.
이치훈 창의적 건축의 시작은 창의성을 담보하는 기획과 발주처 요구사항(OR) 수립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이 문제는 다시 기획으로 돌아간다.
맹필수 ‘상징적’이고 ‘창의적’인 건축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를 별개로 하고,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적인 공사비와 설계비의 부분은 설계 과정에서 메꿀 수 있지만, 부족한 확보라고 생각한다. 기획이 부족하더라도 다른 공사비는 설계자가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계공모를 통해 선정된 인상깊었던 여러 프로젝트들이 사업비 현실화 과정에서 연기, 취소되거나 대폭 변경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예산이 우선 결정돼 있다면, 정해진 예산을 기반으로 현실적인 기획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상문 십여 년 전 일본 유리혼조의 카다레 문화센터(2011)를 방문하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인구 7만의 작은 바닷가 시골마을에 세계적 수준의 복합문화 예술시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비용 저품질에 머물러 있는 공공 건축 수준을 높이기 위해선 더 많은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예산 절감보다 공공 건축은 시민을 위한 보편적 복지라는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조항만 공모지침서를 분석해보면 실질적으로 ‘상징적’이고 ‘창의적’인 건축을 요구하는 설계공모는 의외로 많지 않다.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설계공모의 관행과 시스템에서는 불가능하다. 경쟁이 심화된 최근의 공공 설계공모에서는 형식적으로 공평해 보이는, 즉 뒷말이 없을 심사 절차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 가덕도 신공항, 이건희 기증관 같은 경우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설임에도 공정을 이유로 심사위원이 미리 공개되지 않았다. 심사위원이 미리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을 넘어 당일 아침 심사위원 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려 참석 가능한 사람이 심사위원이 된다. 건축사 자격을 가진 건축가들이 최소 두세 달은 매달려 고민하고 연구한 수십 개의 결과물을 하루에 모두 파악해 비교, 분석하고 우열을 정한다는 것은 ‘건축의 신’ 급들에게만 가능한 일인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엔 풀을 가득 채울 만큼의 ‘건축의 신’들은 없다. 심사가 시작되면 정답이란 없는 설계공모에서 심사위원들은 자신의 전문성과 생각을 주장하지 않는다. 특정 안을 밀어주는 것 같이 비춰지지 않기 위해서다. 공모안의 창의적인 한 방은 반대로 공격이 집중되는 과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공모의 목적에 맞는 미덕을 많이 가진 안보다 특별한 약점이 없는 안이 당선되는 경우가 심심찮다. 심사를 떠나 또 하나 심각한 문제를 하나 꼽자면 비현실적인 사업비와 여유 없는 건폐율, 용적률 등과 같은 사업 기획의 조건들이다. 갈수록 공모대상지는 작아지고 조건들은 법정 요구 조건을 상회하며 사업비는 팍팍하다. 최근 2023년 잠수교 전면 보행화 기획 디자인 국제공모에서 뽑힌 다섯 개 팀에게 참가비를 주고 실시한 문화의 다리, 잠수교 설계공모에서 심사를 맡았다. 1차 기획공모에서의 요구 조건에서 공사비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고 홍수를 포함한 재난에 대한 요구 조건들은 강화되는 바람에 1차 당선 때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기가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국 이 사업은 표류하고 있다.
조남호 최근 혁신적인 안을 요청한 공동주택 공모에 참여해 검증된 보편적 유형인 중정형 주거를 재해석한 안을 제안했지만 훌륭한 심사위원 구성에도 불구하고 석연치 않은 논의 과정에 실망했었다. 수년 전에는 서울시의 요청으로 혁신적인, 한계를 넘는 창의성을 요구하는 공모의 총괄계획가(MP)를 맡았었다. 참가작의 반을 걸러내는 초기 심사에서 눈에 띄는 안들이 대거 제외되는 과정을 지켜봐야만 했다. 건축가들의 역량에 못 미치는 심사의 수준을 끌어올릴 대안은 무엇인가?
황두진 올림픽 이후 각종 체육단체의 사례를 통해 우리 사회가 알게 된 것이 있다. 모든 경쟁력은 공정함과 투명성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간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 설계공모와 관련된 건축계의 부패는 심각한 수준이다. 토론 없이 진행되거나 심사 과정이 공개되지 않는 설계공모는 모두 부패의 온상이다. 심사위원 사전 공개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사전 공개해야 참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여자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것이 맞다. 부당 행위가 발생하는 경우 법적 처벌과는 별도로 분야 내에서도 ‘공공의 적’으로 간주하고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는 현실적으로 건축단체, 특히 대한건축사협회가 주도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Q7.
세계화 흐름 속에서 현재 설계공모는 공정한 경쟁을 담보하는가? 또는 국내 건축가의 경쟁력 향상이 필요한가?
김아연 전문가를 인정하지 않는 발주처의 관행적 태도도 문제지만, 경쟁력 있는 건축가를 양성하기에 현실적 설계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학생들에게 설계사무소가 좋은 직장이라고 선뜻 권하기도 힘들다. 우수한 인재들이 더 이상 설계 분야로 가지 않는데 어떻게 경쟁력 확보가 가능할까.
윤근주 우리에게는 좋은 선수들이 있다. 하지만 장기전은 어렵다. 선수층이 얇기 때문이다. 스포츠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건축 설계공모도 그렇다. 공정성은 전문 심사위원 양성 후에 논할 이야기다.
김현수 해외 스타 건축가의 설계공모 참여가 명성에 의존한 경쟁 구도를 만들어 국내 건축가들에게 불리한 상황을 조성할 수 있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공모 목적에 맞는 세계적 수준의 건축가를 선별하여 공모에 참여시킬 수만 있다면, 그들의 특정 건축 분야에서의 전문 지식과 기술, 창의적 설계 접근 방식 등의 노하우와 경험을 국내 건축계에 공유하는 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는 국내 건축가들이 국제공모에서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조남호 높은 수준의 공사비와 설계비, 엔지니어링 지원으로 탁월한 성과를 이루어온 해외 건축가들에 비해 국내 건축가들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경쟁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해외 건축가들의 초청을 반대할 명분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국내 공모나 당선작 실현 과정의 질을 높여 경쟁력을 제고해야 한다는 문제를 해결하기는 아직 묘연해 보이지만 우리의 과제이다. 불충분한 기획에서 비롯된 해외 건축가들의 국내 작업 상당수가 기존 작업의 재현에 가깝다는 현실이 주는 부끄러움 또한 우리의 몫이다.
남상문 실력 있는 해외 건축가가 국내에 진출하는 건 반가운 일이다. 우리 건축 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다만 최근 해외 스타 건축가를 대상으로 한 지명공모의 문제는 해외 건축가에게만 규제를 완화해주고, 설계비와 공사비를 증액하고, 행정상 각종 편의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 또 다른 문제는 초청되는 해외 스타 건축가 풀이 협소해 특정 회사들만 반복 지명된다는 것이다. 자하 하디드, MVRDV, 유엔스튜디오, 헤르조그&드 뫼롱, 사나 등은 200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건축가들인데 최근 세계 건축 흐름과 동떨어진 느낌이 있다. 건축가를 선정하는 건축 자문위원들이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임동우 공정이라는 단어는 선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폭력적이기도 하다. 수년 전 공공 일로 한국에서 100여 명의 건축가 리스트를 추려내야 할 일이 있었는데, 큐레이터가 추려내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니, 건축 3단체에 공문을 보내 각 단체가 20~30명씩 추천하도록 해야 한다는 발주처의 의견을 받았었다. 무엇이 공정일까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 해외사가 당선되었을 때 공사비나 행정 프로세스 등 많은 부분을 유연하게 해주는 것을 불공정하다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선례로 다른 공공 건축에서도 이러한 특혜가 일반적인 방향이 되도록 변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치훈 세계화된 설계공모 시장으로의 변화 자체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다. 시장의 범위와 별개로 설계공모의 공정성은 심사의 공정성에 달렸다. 심사의 공정성은 작품에 대한 심사위원 개개인의 비평적 판단과 토론의 과정 속에서 얻어지는 공감의 토대 위에서 성립될 수 있다. 분야별 점수 매기기와 같은 형식적 공정성이 아닌 질적 차원의 판단이 요구되고 이것은 비평적 식견을 지닌 전문가 집단으로서의 심사위원에 온전히 의존한다. 2011년 핀란드에서 개최된 세를라크히우스 미술관 괴스타의 증축을 위한 설계공모 심사위원의 평가 리포트는 비평적 담론의 장으로서의 설계공모 심사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1
임성훈 최근에 진행된 국제설계공모의 취약성은 공정성의 문제도 아니고, 우리 건축가의 경쟁력 문제도 아니다. 공공을 위한 건축에서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장 같은 사람이 제가 보기 좋은 것을 만들려는,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최고를 불러와야 한다는 천박한 생각 때문이다.
조항만 한국만큼 자국 건축가를 홀대하는 나라도 없다. 다른 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당분간은 그들의 작품이 남달라 보일 수 있다. 1999년에 완공된 SOM 설계의 GS 타워를 보자. 완공 당시에는 건축학도들이 사례조사에 나서는 대표적 건물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강남 테헤란로에 있는 보통의 빌딩에 불과하다. 국내 건축가들의 경쟁력은 충분하다. 다만 수십 년간 빠듯한 설계비와 최소한의 공사비, 그리고 턱없이 부족한 설계 기간에 적응하도록 강요받은 결과 위축되고 움츠려 있을 뿐이다. 한국의 재능 있는 건축가들에게 같은 조건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스타 건축가와 견줄 만한 수준의, 그러나 한국의 문화와 콘텍스트에 더 적합한 작품들이 태어날 것이다.
황두진 이건 피할 수 없는 문제다. 당장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결국 어느 정도 규모나 사회적 비중이 있는 프로젝트는 국제공모로 가는 것이 맞다. 유통, 음반, 영화, 기타 제조업 등 우리 사회의 다른 분야를 보더라도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경쟁력이 의미 있는 것이고, 시장 보호는 장기적으로 공멸의 길이다. 다만 해외의 심사위원이 더 공정성과 투명성을 담보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과 국내 건축계의 연결고리는 오히려 더 사적이고 은밀한 것일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당사자 개개인의 성향은 알 수 없으니 적어도 제도를 통해 공정성과 투명성을 최소한 담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심사위원을 사전 공개하고, 사전 접촉 시 발생할 수 있는 법적 책임 등에 대해 충분히 공지하며, 토론을 포함한 심사 과정 또한 공개해야 한다. 만약 심사위원이 이 규정을 어기면 국제 건축계에서 공론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Q8.
건축가는 문화 공간 생산과 관련한 정책의 기획, 전개, 실현(또는 지연, 좌초)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현 국내 상황에서 한계는 무엇인가?
김아연 공간을 생산하는 일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또 앞으로도 정치적일 것이다. 행정 수장의 정책 기조에 상반되는 이야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배제된다. 국가의 건축 정책을 총괄하는 국가건축정책위원회부터 이러한 이슈에 관심이 없는데, 건축가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일지 무기력하다. 그래도 대안을 생각해보자면, 제도적으로 정책적으로 공간을 생산하는 전 과정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마스터플래너 공모 혹은 기획공모전이 활성화되면 어떨까. 문제를 진단하고, 대상지를 발굴하고,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창의적인 공간을 기획하는 일의 중요성과 그 일을 수행하는 전문가의 역할과 지위가 보다 명확해지면 좋겠다. 기획자가 준공까지 마스터플래너로 활동하며 설계자와 발주처 사이에서 코디네이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고 실행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윤근주 공공 건축은 설계공모 공고로 건축가가 해당 사업을 인지하기 수년 전부터 사업 계획에 착수한다. 지금 시대의 건축가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보다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야 하는’ 홍반장에 가깝다. 한계 넘기를 위한 실질적 역할을 말하자면, 공공 건축 업무에 기술적 숙련도를 높이는 ‘반장됨’을 마다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하겠는가?
이정훈 좀 더 완성도 높은 기획 및 실현을 위해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건축가가 개입해야 한다. 하지만 건축 기획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 보니 건축적 해결에 대한 구체적인 다양성이 부족하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전문성 있는 건축가가 기획 및 구현 단계에서 개입해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 그러려면 건축의 전 과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건축가를 기획 및 의도 구현 단계에서 실질적으로 일할 수 있게 정책을 입안해야 한다. 그러나 정책 입안 단계에서 기획에 대한 이해도가 없다 보니 예산이 책정되어 있지 않고 이로 인해 전문 인력이 개입하기 힘든 구조다. 턱없이 낮은 자문료 대신 좀 더 실질적인 용역으로 능력 있는 건축가의 개입을 유도해야 한다.
이치훈 건축은 기본적으로 실천적 담론 활동이다. 텍스트, 도면, 전시, 출판 모든 활동이 건축가의 실천적 행위이며 건축물은 그 결과물이다.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이 담론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건축 내부와 외부가 교호하며 공간이 생산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축은 외부로부터 다양하고 복잡한 요구를 받기 마련이다. 건축이 문화적, 혹은 공적 공간의 생산에서 소외받지 않기 위해서는 이 담론 교환의 장에서 전문적, 비평적 견해를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임동우 공공 건축 설계는 건축가의 작은 역할 중 하나다. 동네 사람들의 의견들을 듣고 그들의 추상적인 이야기를 실현해주는 것도 건축가들이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많은 일본의 건축가들이 직접 재난 현장으로 뛰어간 이유가 설계 프로젝트를 따기 위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재난 상황이 아니어도 이러한 건축가들의 역할이 사회 속에 존재한다.
조남호 건축가가 의사결정 구조에서 적어도 발주처와 대등한 위상을 가져야 한다. 현재의 위계구조 안에서는 설계안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공사 단계 설계의도 구현제도도 지난한 설계 AS로 전락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스페인 건축가에 의하면 스페인에서는 건축가가 발주처 소속의 건축사 한 명만 상대해 의사결정을 한다고 한다. 그 건축사가 여러 분야의 발주처를 통합 조율하고, 그 결과를 건축가와 일대일로 협의하는 체계라고 한다. 비슷한 규모의 설계 과정에서 스페인에서 6개월 걸린 프로젝트가 국내에서는 1년 반이 걸렸다고 술회했다.
조재원 공공 문화 공간의 생산 과정에 있어 놀라운 것은 잠재적인 사용자들의 필요가 전달될 수 있는 실질적인 채널은 제한적이며, 많은 경우 생산자의 시각과 편의에 맞춰 재단된다는 사실이다. 건축가는 발주처로부터의 요구 사항 외에도, 운영자, 잠재적 사용자와 공존하는 환경까지 현재와 미래 주체들의 목소리를 듣고 모으는 자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 것도 건축가의 몫이다. 총괄건축가(MA)나 전문위원(PA)으로서의 참여는 전 과정의 서사를 이을 수는 있지만 어떤 지점에서는 현장을 깊숙이 리서치하는 실무를 겸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주체들과 그들의 서사를 문화 공간의 생산 과정에 더하기 어렵다.
조항만 인터넷에는 공간과 건축에 관한 단편적인 정보와 자료가 넘쳐나고, 누구나 건축을 말하지만 건축 공간을 설계하는 작업은 고도로 전문적이다. 교육과 수련, 자격증 없이 설계된 건축가 없는 건축은 위험하다. 건축가에게 좀 더 권한과 책임을 주도록 하자. 자격과 능력이 있는 건축가들에게 문화 공간 생산과 관련된 정책 입안부터, 기획, 전개, 실현에 이르기까지 마스터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일례로 서울시 교육청이 총괄건축가 제도를 도입한 후 꿈을 담은 교실을 비롯해 새롭게 지은 학교 건축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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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편집자주) 본 리포트는 상위 순위와 입상에 선정된 출품작 55개에 대한 심사평을 모두 제공하고 있다. 심사위원단은 제출된 579개의 공모안을 심사하기 위해 총 여섯 번의 회의를 소집했으며, 보편적인 평가서를 작성하며 설계공모를 기반으로 기존 건축물의 보존, 환경과 건축의 연결성 등에 관한 담론을 펼쳤다.
오피니언 : 공공 문화 공간을 생산하는 방식으로서 설계공모 ①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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