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5년 2월호 (통권 687호)
이진오(건축사사무소 더사이 대표)는 현실의 조건과 제약 속에서도 사회적 조정자로서 건축 실천을 묵묵히 이어가는 건축가다. 주택에서 근린생활시설까지, 리모델링과 신축을 넘나드는 그의 세 근작을 톺아보기 위해 김수영(숨비건축사사무소 대표)과 최진석(건축사사무소적재 소장)이 의기투합했다. 대학 동기이자 동료 건축가로, 서로가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본 세 사람의 대화는 날카로운 질문과 애정 어린 비판을 경유하며 일상적 건축에 담긴 다층적인 함의와 그 속에서 작동하는 건축가의 역할을 포착해낸다. 편집자

남현동 예술인마을 내 단독주택 필지에 들어선 만영주택. 벽돌로 된 옛 건물 위로 수직 증축이 이루어졌다. Image courtesy of COOM Partners / ©Kim Yongsoon

하늘에서 본 만영주택 전경. 기존 주택의 경사 지붕(위)과 증축부의 박공지붕(아래)이 대비를 이룬다. Image courtesy of COOM Partners / ©Kim Yongsoon
이진오 건축사사무소 더사이 대표, 김수영 숨비건축사사무소 대표, 최진석 건축사사무소적재 소장
남현동 만영주택: 조형 아닌 조직되는 삶
이진오(이): 하루 동안 남현동 만영주택, 성수동 포대빌딩, 가회동 공간썬더까지 알차게 돌아봤다. 이 작업들을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다. 솔직한 이야기를 부탁한다.
최진석(최): 건축가로서 이진오의 작업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골치 아픈 문제다. (웃음) 각자가 추구하는 건축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더 어려운 것 같다. 오늘 좀 새롭게 다가온 건 조형적인 언어가 눈에 띄었다는 점이다.
이: 조형적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
최: 각기 다른 땅, 다른 콘텍스트에서 지어졌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다른데도, 내 눈에는 모두 하나의 언어처럼 보였다. 형태를 만들려는 모더니즘적 태도가 강하게 느껴졌다고 할까. 실제로 세 건물 중 두 건은 리모델링이고 하나는 신축인데도 다 신축처럼 보이더라.
김수영(김):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느꼈나?
최: 남현동 주택을 보면 리모델링인데, 기존 건물이 땅과 맺는 방식과는 다른 태도로 증축이 됐다. 그래서인지 지금 건물이 땅과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하더라. 증축부 상부 입면의 곡선 처리를 보면 주변 환경이나 상황에 대응하기보다 독자적인 신축의 언어처럼 보였다. 증축부의 단면과 높이, 창의 위치 같은 것들도 잘 납득이 안 됐다. 나라면 지붕 경사를 길 쪽으로 높여 남쪽으로 창을 내고 마당 쪽으로는 낮춰서 마당과의 관계를 정의하려고 했을 것 같은데, 증축하면서 생겨난 마당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무심하게 처리했더라. 이런 부분에서 관계보다 조형을 먼저 생각하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이: 앞동을 증축하고 나니까 건물 사이에 만들어진 마당의 스케일이 너무 작았다. 기존 건물은 세를 주고 건축주 가족은 앞동으로 이사할 예정이어서, 누군가 좋은 분이 들어오면 서로 마당을 공유하면서 공간이 완성되겠구나 생각했다. 그걸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나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증축부 입면의 곡선은 기존 건물 하부의 아치 입면에 반응한 것이다. 곡선의 위치는 건물의 구조 모듈과도 관련이 있고. 건축주는 햇빛이 시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비쳐 감수성을 자극한다며 좋아해주셨다. 옛 건물을 덮고 있던 담쟁이 덩굴을 건축주가 특히 애정했는데 이 곡선면 하단에 화분을 두어 다시 덩굴이 자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주차장과 스튜디오로 쓰이던 만영주택의 전면부 건물을 수직 증축하면서 기존 주택의 앞마당은 공유마당으로 바뀌었다. Image courtesy of COOM Partners / ©Kim Yongsoon

부모님이 거주하던 만영주택의 후면부 주거동은 벽돌과 내부의 목재 마감을 최대한 살려 임대할 수 있는 주거 공간으로 바꾸었다. Image courtesy of COOM Partners / ©Kim Yongsoon

만영주택, 경량철골조로 수직 증축된 딸의 작업실 겸 주거 공간. 긴 장방형 공간을 켜를 나누어 구획하고 박공지붕으로 처리해 공간감을 살렸다. Image courtesy of COOM Partners / ©Kim Yongsoon
최: 저런 형태가 옛것과 새것을 이어주는 데 도움을 주는지 잘 판단이 안 된다. 무언가에 반응하는 것 같다가도 어떤 관계인지는 애매하게 남겨둔 것 같다. 반면 반달 형태로 튀어나온 둥근 발코니나 성수동 포대빌딩의 튀어나온 발코니를 보면 일부러 기하학적인 XY축을 의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조형에 대한 의지가 분명 있었던 게 아닌지?
이: 나는 비례와 연관된 것이라 느꼈는데 조형이라고 말하니까 좀 생경하다. 의장이라는 말인가?
최: 조형(造型), 말 그대로다. 건축가란 결국 형태를 만드는 사람이지 않나.
김: 증축 부분의 마감에 왜 스터코(sto)를 사용했는지도 궁금했다. 조화보다는 대비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기존 주택 위에 경량철골조로 올린 부분이라 가볍게 표현하고 싶었다. 당시에 스터코가 외단열을 해결하며 마감할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재료였다. 기존 건물의 톤에 맞춰 색상을 고르고 면도 거칠게 처리해 너무 새것처럼 보이지 않게 의도했다.
최: 증축된 박공지붕의 경사 방향은 여전히 의문이다. 반대로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이: 앞집이 다가구주택으로 신축되면서 이 집 마당이 훤히 보이는 상황이라 건축주는 앞쪽을 가리기를 원했다. 경사 방향을 바꾸면 마주하고 있는 앞집의 시선을 막지 못했을 거다.
김: (증축된) 앞동만 놓고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뒤에 있는 기존 집의 경사 지붕을 고려하면 그에 대한 어떤 의식이나 반응이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최: 나라면 경사 지붕 집 옆에 박공지붕을 붙이는 일은 절대 안 했을 거다. (웃음) 그런데 박공으로 인해 생기는 내부 공간을 보면 그건 또 수긍이 가더라. 어떤 내재적인 질서를 따르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건축주가 이 집을 어떻게 쓸지 되게 현실적으로 고민한 결과로 보였다.
김: 사실 나도 내부 공간을 만드는 방식이 신기했다. 두 겹으로 공간을 만든다고 설명했는데 그런 태도가 이 집에서도 연속적으로 읽히더라.
이: 원래 내 설계가 아귀가 딱 들어맞는 그런 스타일은 아니지 않나. (웃음) 초기에 많은 부분을 완결되게 규정하기보다 사용자들과 소통하며 정하는 것들이 많다.
최: 이진오의 작업에서 재미있는 건 공간을 심각하게 대하지 않는 것 같은데, 사용자들이 이 공간을 되게 좋아한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자칫 일반적인 3차원의 건축 미학적 관점과 연결지어 생각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전혀 다른 시각에서 봐야 한다.
김: 작업을 보고 나니 오히려 프로젝트를 이끌어나가는 방식이 궁금해졌다. 건축주들과 상의하며 설계를 조직해가는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나?
이: 세 건축주 모두 어떻게 사용하고 싶은지 설명했을 뿐, 디자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 내가 보여주는 안에 대해 ‘어떤 공간이면 좋겠다’라는 정도의 피드백을 주었고. 특히 세 작업은 인간적 교감을 나누는 과정에서 사용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시나리오가 떠오르며 설계가 확 정리되는 시점이 있었다. 이때 비례나 조형 같은 공간적, 시각적 통일성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대신 주택이면 ‘가급적 막다른 공간은 만들지 않는다’, ‘막다른 공간이 생기면 행위가 보이는 곳이어야 한다’와 같이 전체 동선과 공간을 가지고 조직하는 원칙 같은 것들에 신경을 썼던 것 같다.

만영주택, 전면부 스튜디오를 부모님의 거주 공간으로 바꾸고, 그 위로 딸의 작업실 겸 주거 공간을 수직 증축하면서 지하 공간을 일부 파내어 중정을 만들었다. Image courtesy of COOM Partners / ©Kim Yongsoon

만영주택은 예술인마을로 불리는 남현동 안쪽, 관악산 자락에 위치한 주택 겸 작업실이다. 건축주 가족은 단독주택이 즐비했던 동네의 풍경을 간직한 이 집을 현재 상황에 맞게 바꾸기를 원했다. 리모델링은 벽돌과 목재로 지어진 옛 집의 따스한 느낌을 살리되 기능과 동선을 재배치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Image courtesy of COOM Partners / ©Kim Yongsoon
가회동 공간썬더: 보이지 않게 드러내는 법
김: 남현동 주택은 리모델링인데 기존 건물을 어느 정도 존중하려 했는지도 궁금하다. 같은 리모델링 프로젝트인 가회동 공간썬더에서는 외장재가 꽤 부실해 보이는데도 내부만 고치고 외장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 만영주택은 원형을 거의 건드리지 않았다. 그게 존중이라면 존중일 수도 있고, 예산을 절약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공간썬더는 외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수선하는 정도의 예산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구조 해석을 할 때도 건물 외벽이 힘을 다 받는 구조로 풀었는데, 진행하는 과정에서 예산을 조금 더 확보하게 되어 내부 공간을 전면적으로 바꾸게 됐다. 거기에 대해 기존 지붕 기와를 일부 보수하고, 파빌리온을 새로 추가했다.
최: 사실 구조 해석 관점으로 볼 때 공간썬더에서 가운데 있는 벽은 무척 재미있는 요소다. 보통 설계를 할 때 벽 중심선을 기준으로 구조를 보강하고 공간을 구획하게 되는데 이 집은 벽의 선들이 (단면에서) 어긋나 있더라. 나중에 추가한 개구부를 보면 또 기존 벽을 의식한 것도 같고.
이: 기존 주택의 단면에서도 벽들이 서로 어긋나 있었다. 개구부의 위치는 유독 신장이 큰 클라이언트의 생활 높이에 맞춰 결정됐다. 생활 공간인 2층은 함께 쓰는 거실과 내밀한 방 각각의 성격에 맞춰 창의 크기와 높이를 다르게 처리했다. 배면으로는 북촌의 기와지붕 풍경을 볼 수 있게 길게 창을 냈다.
최: 이 집에서 특히 인상적인 건 유리 파빌리온의 위치였다. 답사할 때도 동네에서 이 파빌리온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더라. 그래서인지 마감이나 디테일에서는 특별할 게 없었지만, 건축적 태도로 볼 때 가장 자의식이 강한 프로젝트라고 느껴졌다.
이: 건물 정면에 사람들을 환대하는 제스처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당초 1층 정면을 덧대는 안으로 설계했다가, 마당 앞으로 현대판 정자라 할 수 있는 유리 파빌리온을 증축하는 쪽으로 제안했다. 파빌리온은 기존 주차장 구조물 위에 가볍게 올린 것이다. 대지경계선이 현재 건물선보다 도로 쪽으로 더 나가 있어서, 조금이라도 땅을 되찾을 수 있게 건물 바깥으로 구조물을 돌출하면서 가시성도 좋아졌다. 다만 초기 설계 때는 담장 밖으로 70cm를 뺐는데 전고가 높은 택배차에 부딪히면 유리도 파손되고 문제가 복잡해질 우려가 있어 돌출 길이를 35cm로 줄였다.

성수동 포대빌딩의 1층. 환대하는 제스처가 느껴지도록 바닥 레벨을 낮추고, 전면의 공용 부분을 넓게 배치했다. ©Yoon Hyeonki

성수동 포대빌딩 전경. 대지는 성수동 아틀리에길의 메인 가로와 서울숲 사이 막다른 골목에 위치한다. 골목을 통해 진입하는 것을 고려해 건물의 정면을 3m 폭의 도로가 아니라 골목에서 보이는 측면으로 생각했다. 길에서 알루미늄 메시로 마감한 4층 높이의 계단실이 먼저 인지되도록 했다. 세장한 대지의 공간 활용을 위해 동선을 간결하게 구성하고, 각층의 전면에 외부화된 공용 공간(발코니, 테라스)을 배치했다. 성수동의 특성을 반영해 외부마감에 붉은벽돌을 사용했다. 외벽 치장은 0.5B 막힌줄눈쌓기로, 테라스 난간은 1B 화란식쌓기로 처리했다. 계단실 전면은 벽돌을 반으로 자른 단면을 드러내어 의장적 요소로 사용했다. ©Yoon Hyeonki
성수동 포대빌딩: 미완의 건축
최: 공간썬더의 유리 파빌리온처럼 포대빌딩 역시 거리에서 잘 보이는 코너에 계단실을 단독으로 돌출시켜 눈에 띄게 처리했다. 건물 정면이 아니라 계단실 측면이 보이는 뷰가 이 프로젝트의 메인컷이라고 느껴졌다. 의도된 작가적 태도라고 할까. 그런데 도시 상황에 대처하는 이런 방식을 자세히 보면 의식은 했으나 끝까지 만지지 않고 남겨둔 부분도 있더라.
김: 발코니는 철골로, 계단실은 콘트리트로 된 부분에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재료나 튀어나온 정도에 일관성이 느껴지지 않는데, 차라리 콘크리트로 통일했으면 어땠을까.
최: 오히려 나는 층별로 테라스처럼 널찍하게 튀어나온 부분의 재료나 구조 처리는 이해가 됐다. 그런데 꼭대기 층에 좁은 폭으로 불쑥 튀어나온 저 발코니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좀 의아했다.
이: 건축주가 처음에는 4층에서 도시락집을 운영할 계획이었다. 돌출된 발코니에서 도르래로 도시락 바구니를 아래로 내릴 수 있게 길이를 뺐는데, 완공하고 나서 공간의 용도가 바뀐 것이다. (웃음) 당초 건물과 일체화된 콘크리트 구조물로 계획했는데 구조 문제상 어쩔 수 없이 철골로 변경됐다.
김: 특정 환경에서 벌어질 수 있는 재밌는 해프닝이라고 해야 하나. (웃음) 이진오의 건축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어서 흥미롭다. 애매하게 덧붙은 이 발코니가 주변 성수동 풍경과 그럭저럭 잘 어울린다는 점도 재미있고.
최: ‘주(main)’와 ‘종(sub)’을 구분하지 않고 상황에 맞춰 혼성의 언어로 대응하는 제스처다. 완결된 아이디어에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혼성의 풍경이 전면에 드러난 것 같다.
이: 처음부터 완결성을 추구하기보다는, 두루뭉술한 생각에서 출발해 툭툭 아이디어들이 치고 나오면서 느슨하게 조직해가는 편이다. 설계라는 게 단계별로 꽉 짜여져 돌아가는 그런 과정은 아니지 않나. 그래서 평소 직원들과 소통할 때도 가이드를 느슨하게 주는 편이다. 아이디어가 유지만 된다면 사용하기 편한 방식으로 변형돼도 괜찮다. 건축주 의견도 잘 수용하는 편이다.
최: 그런 태도에는 분명한 한계도 있을 것이다. 아이디얼한 개념에서 출발했는데 마지막에 이런저런 다양한 것들이 덧붙어 자칫 어설퍼 보이는 결과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이진오의 성정을 생각하면 강력한 아이디어로 끌고 가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조직되는 방향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완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선이나 형태를 맞추려는 조형적 제스처들 때문에 스탠스가 애매하게 걸쳐 있는 것 같다.
김: 다양한 목소리를 수용하는 건축 그 자체가 ‘이진오’답다고 느끼는데, 궁극적으로 설계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무엇인가?
이: 사용자들이 잘 살아가는 것이다. 건축의 생명력이라는 게 조형이나 미학이 아닌 쓰임으로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나의 역할은 설계에 얽힌 다양한 주체들 사이 관계를 원만하게 조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공간 조직을 더 중요하게 보는 것 같다.
최: 내가 느낀 어색함, 애매함의 이유가 그것 같다. 내부 공간의 조직을 중요하게 다룰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건물에서 형태를 의식한 부분들이 감지됐기 때문에.
이: 건축가로서 학습된 형태나 비례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 있지 않겠나. (웃음) 다만 그걸 먼저 의도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차이다.
최: 공간썬더에서 1층 갤러리에 힌지드 스페이스(hinged space)를 만들어놓은 것도 어떤 조형 의지가 작용한 게 아닐까.

©Yoon Hyeonki

성수동 포대빌딩의 1층. 계단실로 이어지는 1층 공용 부분(위)과 1층 내부(아래) ©Yoon Hyeonki

©Yoon Hyeonki

성수동 포대빌딩 2층 전면부의 발코니(위)와 2층 실내에서 바라본 발코니 공간(아래) ©Yoon Hyeonki
이: 앞서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힌지드 스페이스가 되면 거기서 만들어질 수 있는 상황이 더 풍부 해진다. 평소에도 내가 작업하는 방식을 소설가에 비유하곤 한다. 특정한 상황을 설정하고 인물을 등장시킨 다음, 캐릭터를 부여해 등장인물들이 이 구조 안에서 놀게 하면서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걸 즐긴다. 세련된 언어로 다듬는 것은 내 역할이라 생각되지 않더라. 여러 번 퇴고하는 것도 내 몫은 아닌 것 같다.
최: 이를 영화에 비유하면, 웰메이드 시스템 안에서 각본대로 만들어진 영화와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비교할 수 있겠다. 완벽하게 짜여진 스토리의 영화를 홍상수처럼 찍으려고 하면서 발생하는 애매함 같다고 할까.
이: 나는 아직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나 ‘강원도의 힘’ 정도에 있는 건가? (웃음)
최: 만영주택은 공간도 좋고 사용자도 만족하고 즐거워하는데도 뭔가 모를 아쉬움이 있었다. 미장센은 다 좋은데 완성된 내용이 살짝 아쉬운 느낌이다.
이: 어떤 말인지 알 것 같다. 실토하자면 신축이든 리모델링이든 내게 주어진 설계 범위 안에서 비용이나 클라이언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도에 따라 내가 다 컨트롤하지 않고 놔둔 부분도 분명 있다. 인근 주택가의 옛 단독주택들이 헐리고 변화하는 상황에서, 지금의 연희동 같은 변화, 즉 중간 단계의 증축 같은 것들이 어우러져 있었으면 다르게 읽힐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최: 우리가 건축에 입문했을 때 건축하는 방식과 건축을 배워가면서 건축하는 방식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학습되었던 미학적 기준 같은 것들이 잔존해 불쑥 드러났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그 말을 들으니 내가 4학년 졸업작품을 할 때 김수영 소장이 “네가 되게 세련되어지기는 했는데, 옛날에 가지고 있었던 힘이 없어진 것 같아”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웃음)
김: 그 말을 기억하다니! 그 상황이 지금 여기까지 온 건가? (웃음)
최: 공부하면서 혹은 자연스레 접하게 된 건축 언어들이 내면화되어 영향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세 프로젝트가 오래된 동네의 변화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질 거냐는 질문을 품고 있는데, 결국 답이 개인의 문제로 귀결된 느낌이다. 그때그때 상황에 반응한 결과라고 이해하면 될까?
김: 그 역시도 건축가의 성정, 소양과 관련이 있다. 이진오 개인의 성향과는 딱 맞는 건축이지 않나.
이: 내가 재미있어 하는 건 그런 거다. 성수동 포대빌딩에서 발코니는 캔틸레버 구조로, 계단실은 슬래브에 붙어 있는 구조로 처리하고, 둘이 다르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사이를 이격하는 것.
김: 형태에 대한 미학적 판단은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런 식으로 주어진 상황에 대한 해석이 건물에 잘 드러나면 좋겠다. 우리 같으면 건물에 창을 낼 때 입면의 조형이나 구성을 생각해 창의 위치나 개수를 정하겠지만, 이진오에게는 공간 안에 있는 사람이 경험하는 상황이 더 중요하지 않나. 외부 형태의 완결성보다는 바깥 풍경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는 자리에 창을 내는 것. 사용자들을 떠올리며 적절한 선에서 언제든 수정하고 바꾸는 태도 말이다. 반대로 우리는 절대 못할 것 같다. (웃음)


가회동 공간썬더. 기존 건물의 내부는 벽체를 최소한으로 남기고 철거한 후 필요한 부분만 철골구조로 보강했다. 공간 활용을 고려해 1층 전시장(위)과 2층 주택(아래)에 각각 가변형 스윙도어를 설치했다.

북촌 한옥마을 초입에 위치한 공간썬더.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양옥건물을 리모델링해 1층은 사무실 및 전시 공간으로, 2층은 건축주의 주거 공간으로 바꾸었다. 골목이 갈라지는 지점에 있어 사람들을 쉽게 건물 안으로 유입하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전면부에 철골조로 된 유리 파빌리온을 추가해 전시 공간을 확장해 쓰거나 팝업스토어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2층은 전면부에 발코니를 증축해 주택의 외부 공간을 마련했다. 마을을 조망하며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난간은 대문과 형태를 같이하여 입면에서의 통일감을 주고자 했고, 길에서의 시선을 가로막지 않도록 환봉을 사용해 개방감을 주었다.
건축하기: 다르지만 즐겁게
이: 우리 회사에는 프로젝트 진행 여부를 결정하는 ‘3F’ 기준이 있다. 먼저 펀드(fund), 돈이 되어야 하고, 둘째로 펀(fun), 즐거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페임(fame)을 줄 수 있는지 본다. 사실 오늘 돌아본 세 프로젝트는 큰 수익을 기대하기보다는 작업하는 과정이 즐거웠던 ‘더사이(The SAAI) 다운’ 것들이다. 무엇보다 답사하면서 사람들이 잘 쓰고 있는 모습을 봐서 기뻤다.
김: 오늘 만난 분들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섬세하게 집을 채우고 가꾸는 분들이더라. 집에 대한 애착도 굉장히 강하고.
이: 그래서인지 빠른 시간에 답을 도출하는 설계공모보다는 개인 클라이언트와 소통하며 찾아가는 작업이 더 편안한 옷 같다. 프로젝트 초기에 구체적인 상이 떠오르지 않아도 진행 과정에서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고, 또 언제든 수정할 수 있으니까. 이런 작업들이 우리 사무실의 ‘힐링 프로젝트’다.
김: 이진오의 경우에만 그런 것 같다. (웃음) 요즘은 공모 기획 단계에서 많은 것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설계공모가 더 수월하게 다가왔다.
최: 나와도 완전 반대다. 남의 간섭을 받지 않는 설계공모가 내게는 힐링 프로젝트인데. (웃음) 우리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건축가를 선비처럼 생각했다. 스승격인 4.3그룹 세대들도 선비 정신을 이야기하며 전통 건축 답사를 다니지 않았나. 그래서 자기 건축을 이야기할 때 어떤 철학이나 개념을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때부터 건축가가 선비에서 장인, 그러니까 중인(中人) 정도로 내려온 것 같다. 상업적인 일도 많이 하지만 테크니션 쪽으로 기운 분위기다. 요즘에는 건축학과 학생들을 보면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다는 생각도 든다. 테크니컬하게는 잘하는데 이게 맞는 방향인가 고민이 되더라.
김: 조건과 상황도 변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바도 변하니 건축가의 상이 달라지는 것도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그래도 이런 자리를 통해 서로가 얼마나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 위치를 가늠하고 확인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이: 혼자 일하기 시작한 지 4년밖에 안 된 신인이다. (웃음) 앞으로도 잘 지켜봐 달라.

공간썬더의 유리 파빌리온은 1층 전시공간의 연장으로 외부 공간인 마당과 연계해 사용할 수 있다.

북촌 한옥마을로 진입하는 골목에서 본 공간썬더. 전면의 유리 파빌리온이 먼저 눈에 띈다.

공간썬더의 유리 파빌리온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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