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5년 11월호 (통권 696호)
사고가 물질로 바뀌는 순간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2013)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는 순간이 아니었다. 평범한 회사원이던 월터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내리막을 질주할 때였다. 방향을 조절하기 위해 돌멩이를 손에 묶고 낮은 자세로 보드에 몸을 실은 그를 보는 나에게도 바람을 가르는 속도가, 돌멩이가 땅을 긁는 감각이 느껴지는 듯했다. 물리법칙을 위배하는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넘어봄 직한 문턱을 돌파할 때 희열은 더 커진다.
이용주(이용주건축스튜디오 대표)의 책 『생각의 구축』을 읽으며 이 영화를 떠올렸다. 평범한 목재부터 광섬유, 스티로폼, 그리고 벌레, 균사와 같이 무기물과 유기체를 넘나드는 재료와 AI나 로봇팔, 3D 프린터처럼 아직 한국 건축에서는 희소하게 적용되는 기술에 천착하는 그의 방식을 컴퓨테이셔널 디자인이라고 요약해버리기에는 설명이 미진한 느낌이다. 분명한 건 이 분야의 대세가 무엇이든 이용주는 실재하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은 마치 가상의 컴퓨터 공간 안에서 이뤄지는 듯 하지만 상당히 물리적인 환경과 인간의 노동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오늘날 컴퓨테이셔널 디자인과 사이언스 픽션(SF)에 대한 인식은 여러모로 비슷하다. 우선 끊임없이 갱신되는 기술에 기반한다는 특성상 그 외연이 계속 넓어지기 때문에 명확하게 정의내리기 어렵다. 한때는 건축의 미래를 상징하는 듯했던 파라메트릭 디자인이나 가상현실(VR)에 대한 관심이 예전 같지 않은가 하면, 재료 디자인이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위한 분야로 떠오르기도 한다. 또한 정통이 아니라 특정 장르의 관습을 따르는 ‘장르물’이란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SF가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측면이 있음에도 과학과 기술적 상상력에 기반한 오락물에 불과하다는 인식. 컴퓨테이셔널 디자인 역시 건축의 본질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도구에 불과하다는 편견. 그러나 이용주는 논리적 체계의 구축을 의미하는 연산적 사고, 이러한 사고를 실제 공간(물질)으로 구현하기 위한 고도화된 제작 기술, 그리고 새로운 개념이나 기술을 다루는 설계 프로세스 자체를 설계하는 일… 이러한 접근이 생각과 실험이 함께 자라나는 열린 구조가 된다고 말한다. 또한 지속 가능한 재료와 전통의 재해석과 같은 전략적 접근을 통해 기술적으로 후발주자라는 제약을 넘어서고자 한다. 그리하여 생각을 물질로 구축하는 순간 새로운 건축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믿는다.
「SPACE(공간)」 59주년 기념호는 이용주의 컴퓨테이셔널 디자인 작업을 소개하며 새로운 건축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균사재(2024), 분해의 적층(2025), 위상한옥(2025), 갈래마당(2025), 호텔명동역(2025)을 통해 프로세스 자체를 설계하는 방법론을 살펴본다. 더불어 윤정원(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정해욱(미드데이 공동대표)과 함께 재료와 툴, 형태를 중심으로 나눈 이야기는 ‘크고 이상한 것’을 만들고 싶다는 이용주가 앞으로 초대할 낯선 세계 역시 기대하게 한다.
2024년 2월호부터 장장 11회에 걸쳐 중소도시에 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 준 연재 ‘소멸의 가능성, 중소도시포럼’이 이번 호로 마무리된다. 그간 새로운 발상과 무한한 성실함으로 연재를 이끌어왔던 이장환, 이상현 두 필자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성원해주신 독자분들께도 감사드리며 그간의 연재는 공간서가의 단행본으로 다시 독자들을 찾아갈 것을 약속드린다.
편집장 김정은
「SPACE(공간)」 2025년 11월호 (통권 696호) 목차
006 EDITORIAL
008 NEWS
026 ADVERTORIAL
공존을 위한 일상을 디자인하다: 2025 대민한국 공공디자인대상_ 김혜린
Designing the Everyday for Improved Coexistence: 2025 Korea Public Design Awards_ Kim Hyerin
032 FRAME
프로세스를 설계하다: 이용주건축스튜디오
Designing the Process: Yong Ju Lee Architecture
034 FRAME: ESSAY
조금 이상한, 살짝 개인적인, 하지만 단단한_ 이용주
A Little Strange, Slightly Personal, Yet Solid_ Yong Ju Lee
038 FRAME: PROJECT
균사재
Mycelial Hut
044 FRAME: PROJECT
분해의 적층
Strata of Decomposition
048 FRAME: PROJECT
위상한옥
Topology: Hanok
056 FRAME: PROJECT
갈래마당
Reaction Field
062 FRAME: PROJECT
호텔명동역
Hotel Myeongdong Station
066 FRAME: DIALOGUE
컴퓨테이셔널 디자인이 서 있는 지점들: 재료, 툴, 물질_ 이용주 × 윤정원 × 정해욱
Where Computational Design Stands Now: Materials, Tools, Matter_ Yong Ju Lee × Yoon Jungwon × Jeong Haewook
076 PROJECT
유지커피웍스 - 이성범건축사사무소
YUJI Coffee Works – LSBA
088 PROJECT
자자헌(自自軒) - 스페이스매터 건축사사무소
The River Pavilion – Spacematter Architects
098 LIFE
자기 진술과 자기 비평 사이에서 좌표 찾기: 〈안티-셀프: 나에 반하여〉_ 방유경
Locating the Coordinates Between Self-Statement and Self-Critique: ‘Undoing Oneself’_ Bang Yukyung
106 REPORT
안과 밖의 관계를 탐구하는: 이키모노 아키텍츠_ 후지노 다카시 × 이소운
Exploring the Relationship Between Inside and Outside: Ikimono Architects_ Fujino Takashi × Lee Sowoon
114 REPORT
대중성 바깥으로 빠져나간 이야기들: 제5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_ 방유경
Stories Beyond Popula Appeal: The 5th Seoul Biennale of Architecture and Urbanism_ Bang Yukyung
120 SERIES: The Possibilities Inherent in Extinction, Mid-Size City Forum 11
시설의 변이: 이동식 시설과 정류소_ 이장환, 이상현
Mutation of Facilities: Mobile Facilities and Stations_ Lee Janghwan, Lee Sanghyun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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