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6년 1월호 (통권 698호)
「SPACE(공간)」와 정인하(한양대학교 교수)는 장융허(「SPACE」 690호 FEATURE 참고)에 이어 구마 겐고와의 인터뷰를 통해 ‘동아시아 근현대건축사’의 궤적을 추적한다. 구마는 대학 시절과 실무를 할 때 일본 버블 경제의 정점과 붕괴를 몸소 경험했다. 그는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과 마찬가지로 과시적이었던 일본 버블 시기의 건축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버블 경제 시기에 활발히 활동했던 이전 세대 건축가들과는 다른 건축을 모색하고자 했다. 구마 겐고와의 인터뷰는 2회에 걸쳐 연재되며, 이번 편에서는 건축의 근간이 된 초기 경험과 콘크리트와 대비되는 재료 사용, 형식과 자유의 이분법 개념을 짚으며 그가 견지해온 건축적 태도를 살핀다.

©Erieta Attali

©Kengo Kuma & Associates
인터뷰 구마 겐고 켄고 쿠마 앤드 어소시에이츠 대표 × 정인하 한양대학교 교수
건축의 근간이 된 어린 시절
정인하(정): 먼저 개인적 배경부터 짚어보고 싶다. 요코하마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지내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줄 수 있나?
구마 겐고(구마): 나는 오쿠라야마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1954년 무렵 오쿠라야마는 대부분 논이었고, 큰 건물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생활 방식을 유지해온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 아주 행운이었다. 일본어로 ‘사토야마(里山)’는 마을과 산이 맞닿아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 마을과 산, 그리고 그 사이로 농가들이 줄지어 있는 풍경, 오쿠라야마에서도 찾아볼 수 있던 전형적인 일본의 작은 마을 구조다. 이런 곳에서의 삶은 자연의 자원과 연결되어 있다. 전기가 보편화되기 전인 19세기 이전까지 사토야마 사람들은 나무를 직접 베어 집의 재료와 가구, 그리고 일상의 에너지원으로 사용했다. 이러한 순환 체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나의 아버지는 디자인과 건축을 사랑하는 엄격한 회사원이었지만, 나 또한 농부의 집에서 이러한 생활을 직접 경험했고 이 경험은 내 건축적 실천의 근간이 되었다.
정: 한국어로 번역된 저작을 읽었는데, 할아버지가 지은 목조주택에서 자랐다는 이야기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 집의 구체적인 모습과, 이것이 훗날 건축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궁금하다.
구마: 1959년부터 1960년까지, 그 지역에서 다수의 주거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이 시기 확산된 주택들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재료로 지어졌고, 목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다다미도, 쇼지(전통 종이 미닫이 문)도 없었고, 천장에는 형광등이 달렸고, 합판으로 된 벽이 있는 근대적 재료로 구성된 집이었다.
하지만 내가 어릴 때 살았던 집은 완전히 달랐다. 내가 태어난 집은 전쟁 이전에 지어진 작은 목조주택이었다. 지역 장인들의 손길이 닿은 그리고 자연 재료로 만들어진 아주 아담한 집으로, 다다미가 깔려 있었으며, 흙벽과 쇼지 문이 있었다. 전쟁 이전 일본 주택의 전형적 구성 방식과 재료가 우리 집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거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나는 그 집을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초라해 보였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나이가 들며 점차 그 집이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한 후에는 그 집이 자랑스러워졌다.
정: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기로 결심한 시점은 언제였나? 그 결정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구마: 1964년, 단게 겐조가 설계한 요요기 체육관(1964)을 방문했던 경험이 가장 중요한 계기였다. 내가 열 살이던 1964년 10월쯤 아버지께서 경기장에 데려가주셨다. 정말 아름다운 건물이었고, 큰 충격을 받았다. 구조적으로도 정말 놀라운 디자인이었다. 두 개의 거대한 기둥에 의해 떠 있는 듯한 느낌. 유기적인 형태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건축물과는 전혀 다른 기하학을 사용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버지께 요요기 체육관을 설계한 건축가를 여쭈어봤고, 아버지가 ‘단게 겐조’라고 답해주셨던 것이 기억난다. 사실 고양이를 아주 좋아해서 수의사를 꿈꿔왔었다. 하지만 그 건물을 본 후 내 꿈이 수의사에서 건축가로 완전히 바뀌었다. 정말로 완전히. 또, 대학 입학 전인 1970년에는 친구와 함께 오사카 엑스포를 보러 갔던 것이 생각난다. 단게 겐조가 중앙 광장을 설계했고, 구로카와 기쇼가 5~6개 건물을 설계하는 등, 메타볼리즘이 주역으로 등장한 박람회였다. 하지만 매우 실망스러웠다. 구로카와 기쇼의 책에서 자연과 아시아의 중요성에 대해 읽었는데, 그 당시 오사카 엑스포는 자연과도, 아시아와도 거리가 멀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16살 당시의 경험과 생각은 내가 미래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나카가와마치 바토 히로시게 미술관(2000)
일본 도치기현에 위치한 이 미술관은 우키요에 화가(에도시대 풍속 판화) 안도 히로시게(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을 위한 미술관이다. 구마는 히로시게의 목판화에 나타나는 독특한 공간구성을 3차원 공간에 구현하고자 했는데, 서양 회화의 원근법과 대조되는 히로시게 특유의 투명한 레이어 중첩 방식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바 있다. 이를 위해 구마는 지역 특산물인 삼나무 루버를 활용했다. 가늘게 켠 루버는 빛을 부드럽게 제어하며, 지역의 돌과 종이 등 토착 재료를 적극 사용하여 지역사회와의 공생을 꾀했다.
격변의 시대, 다른 길을 모색하다
정: 도쿄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던 1970년대는, 일본 사회가 정치·경제적으로 큰 격변을 겪던 시기였다. 그러한 변화에 어떻게 대응했나?
구마: 1970년대는 일본의 매우 주요한 시기였다. 인구와 GDP가 동시에 빠르게 증가하다가 1970년 전후로 인구 증가 속도가 느려지고 경제성장도 둔화되며 사회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시기에 이러한 일본 사회의 큰 변화를 직접 체감했다. 동시에 단게 겐조, 구로카와 기쇼, 이소자키 아라타, 기쿠타케 기요노리 등 그 이전 세대의 건축가들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사회적 변화의 흐름에 맞는 다른 방향의 건축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이러한 사회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하라 히로시에게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와의 만남은 내 인생을 통틀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정: 하라 히로시와의 이야기는 추후 자세히 이어가기로 하고, 우선 건축가 마키 후미히코의 영향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글에서 마키의 영향을 여러 번 언급했다. 구체적으로 그의 어떤 점이 큰 영향을 주었나?
구마: 대학에서 공부하던 1970년대 당시 나는 앞서 언급한 이전 세대 건축가들 아래 조성된 분위기를 선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키는 달랐다. 단게는 건축 디자인과 도시 디자인 양쪽 모두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제자 중 도시환경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사람은 마키였다. 단게가 강한 축을 가진 ‘선형 도시’를 이상으로 삼았던 것과 달리, 마키는 아시아의 인간적 스케일을 지닌 다소 혼재된 도시의 매력을 이해했고, 그것을 실제 작품 속에서 실현하려고 했다. 그의 디자인은 매우 친밀하고, 소박하고,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듯 싶었다. 나는 환경에 대한 이러한 마키의 태도에 깊은 연대감을 느꼈다. 그래서 학부와 석사 과정 중 마키의 사무소에서 3~4년간 인턴십을 했고, 그 기간 마키와 굉장히 가까워졌다.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경험이었다.
정: 일본의 버블 시기 건축을 공부했고, 버블 붕괴 이후에 본격적으로 실무를 시작했다. 두 시기의 차이와, 변화를 체감한 것이 있다면 알려 달라.
구마: 내가 실무를 시작했던 1980년대에도 일본은 여전히 버블 경제 시기에 있었다. 당시에는 표면과 파사드 디자인에 치중한 프로젝트들이 넘쳐났다. 나 역시 몇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M2 빌딩(1991)을 포함한 그 시기의 작품에 만족하지 않는다.
1991년부터는 완전히 다른 시대가 시작됐다. 건축의 텍스처가 달라지게 된 시발점이었다. 버블 경제가 붕괴하면서 내가 도쿄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취소됐고, 나는 지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후 10년간 도쿄에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았다. 대신 일본의 지방에서 지역 목수가 참여하는 소규모 작업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 지방에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현장의 목수들과 대화하며 대학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장인 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 도쿄대학의 교육은 오로지 콘크리트, 강철, 모더니즘만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목수들에게서 일본의 전통을, 장인 정신을 체득할 수 있었다.

©Kengo Kuma & Associ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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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적 버내큘러 건축 연구
정: 내가 보기에 하라 히로시는 다른 유형의 건축가였다. 우메다 스카이 빌딩(1993)에서 볼 수 있듯, 거대하고 상상력이 강한 건축을 추구해온 건축가라는 인상이 있다. 하라는 당신의 커리어 형성 과정에서 멘토로서 어떤 역할을 했나?
구마: 하라는 다른 건축가들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었다. 구로카와 기쇼도 아시아 디자인의 중요성과 아시아 도시의 아름다움에 대해 글을 썼지만, 일종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방향이었다. 버나드 루도프스키의 『Architecture Without Architects(건축가 없는 건축)』(1964)으로 대표되듯, 당시 서구에서도 다소 노스탤지어적이고 오리엔탈리즘적인 태도로 마을을 연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하라는 향수나 오리엔탈리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마을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태도로 현대건축에 마을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려고 했다. 오래된 마을의 친밀함과 지혜를 현대건축으로 들여오려 한 것이다. 이는 매우 큰 도전이었다. 그의 이러한 태도와 생각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다만, 하라의 대표적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우메다 스카이 빌딩과 교토역(1997)에서, 하라가 사용했던 산업적 알루미늄, 유리, 콘크리트의 물질성은 선호하지 않는다.
정: 하라와 함께 전 세계의 버내큘러 주택과 마을을 연구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여행한 바 있다. 이 여행이 당신의 건축 이론과 실천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구마: 내 건축 철학은 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을 통해 형성됐다고도 말할 수 있다. 1970년, 하라 히로시와 함께 아프리카 사하라의 사막 마을을 답사하는 리서치 트립에 참여했고, 그곳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가족제도인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일부다처제가 표준이며, 그 가족 형태가 주거의 평면 계획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표준’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세계의 표준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매우 큰 배움이 되었다.
또 그 여행을 통해 여러 나라의 마을을 보면서, 표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마을의 숨은 구조에 대해 배웠다. 일본의 마을을 연구하던 많은 역사학자들은 그저 겉으로 보이는 양식만 살폈지, 구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는 역시나 노스탤지어적이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 하라의 관점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마을을 수학적으로, 기하학적으로 바라봤다. 또한 모더니즘을 포함한 서구의 도시계획이 직각을 기본으로 하는 유클리드 기하학에 지배되어 있다며, 이에 대항하는 도시계획을 하려면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나 위상기하학을 비롯한 ‘새로운 수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늘 우리를 독려하곤 했다. 그 새로운 수학을 실무에 유효한 도구로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단계까지는 가지 못했던 것 같지만, 내가 5년 전에 집필한 『点・線・面(점·선·면)』(2020)은 하라 히로시의 마을의 기하학에 관한 연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정: 다음으로는 팀 텐의 영향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당신의 버내큘러 건축 연구는 알도 반 아이크와 같은 유럽 건축가들의 구조주의적 사고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당신의 책에서 기후위기 시대에 건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고 한 언급을 여러 번 보았는데, 이러한 관점이 유럽 건축가들의 구조주의적 사고와 닮아 있다고 느꼈다. 이 두 개념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구마: 그렇다. 나는 팀 텐의 사상이 하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규모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하라는 작은 입자들과 같은 작은 스케일에 관심을 둔 반면, 팀 텐은 더 큰 스케일을 지향했다. 이전에 런던에 위치한 이코노미스트 빌딩(1964)의 리노베이션 작업(사케노하나, 2007)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 경험을 통해 건축에 있어 유럽과 아시아의 사고방식 차이에 대해 이해하게 됐다. 본래 앨리슨과 피터 스미슨 부부가 설계한 건물로, 그들은 빌딩에 석재를 사용했고, 돌이 가진 입자성에도 관심을 두고 있었다. 나는 그 접근 방식에 공감했다. 그러나 건축 규모 면에서 아시아의 건축과는 확실히 달랐다. 아시아 건축은 자연 재료를 활용한 작은 스케일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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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케노하나(2007)
런던 중심부, 피터와 앨리슨 스미슨 부부가 설계한 영국 모더니즘 걸작 이코노미스트 빌딩(1964)의 저층동을 일식 레스토랑으로 리노베이션한 프로젝트다. 구마는 기존 건물의 고딕풍 외관과 수직적인 석재 패턴에서 영감을 받아, 일본산 편백나무와 대나무 등 얇은 부재를 엮어 숲과 같은 내부 공간을 구현했다. 개구부에는 회전식 대나무 블라인드를 설치해 시선과 빛을 부드럽게 제어했다. ©Kengo Kuma & Associates
환경의 시대, 재료성으로의 전환
정: 많은 일본 현대건축의 주요 건축가들이 1955년 전후에 태어났다. 세지마 가즈요, 반 시게루 그리고 당신도 이 세대에 속한다. 이들은 건축에서 재료를 강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지마 가즈요는 유리를, 시게루 반은 종이를, 그리고 당신은 목재를 주요 재료로 다룬다. 이런 공통점은 우연인가? 혹은 더 넓은 세대적, 문화적 관점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구마: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난 우리 세대와 이전 세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안도 다다오와 이토 도요는 모두 1940년대 출생으로 1980년대에, 즉 버블 붕괴 이전에 주요 작업을 완성했다. 버블 붕괴 이후, 일본에서는 본격적으로 ‘환경 중심의 시대’가 시작됐고 우리 세대의 건축은 이러한 새로운 시대 흐름에 더 적합한 방향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목재를, 반 시게루는 종이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정: 당신은 철근콘크리트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하지만 실무에서 특히 큰 규모의 건축이거나 예산이 제한된 프로젝트에서 콘크리트의 사용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당신의 작업에서는 콘크리트 사용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하나? 콘크리트 사용과 관련해 현실에서 어떤 방식으로 타협하는지 궁금하다.
구마: 콘크리트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기본적으로 나의 유년 시절의 공간 경험과 삶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자연 재료로 지어진 집에서, 친구들은 콘크리트로 지어진 집에서 살았다. 각각의 집의 분위기와 삶의 방식 역시 완전히 달랐다. 우리 집에서는 정원의 생태계를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이 건축과 완전히 통합되어 있었다. 반면, 콘크리트 주택은 자연 및 환경과의 관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다만, 나는 근본주의자가 아니다. 근본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소음을 배제하려고 하지만, 나는 서로 다른 요소들 사이에서 조화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우리도 콘크리트와 철근을 자주 사용하지만, 언제나 자연 재료 및 구조와 조화를 이루려고 한다.



형태의 자유를 위한 수평적 관계 맺기
정: 『負ける建築(약한 건축)』(2004)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형식(국가, 공급자)과 자유(시민, 소비자) 사이의 이분법 관점이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러한 이분법이 근대건축을 이해하는 아주 독특한 틀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일본의 특수한 근대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약한 건축』에 등장하는 형식과 자유라는 이분법을 구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구마: 유럽과 미국과 같은 서구 사회에서는 개인이 가장 중요하며, 건축가가 위계의 정점에 서서 혼자 결정하는 구조가 일반적이었다. 반면, 아시아 특히 일본에는 오랫동안 ‘건축가’라는 존재가 없었다. 대신 목수들이 집을 설계하고 지었다. 목수와 장인이 함께 일하는 수평적 작업 방식이었다. 현대사회에서도 이러한 수평적 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프로젝트의 초기 단계부터 장인들과 함께 하고, 조직 내부적으로도 늘 수평적인 관계를 맺고자 한다. 조직의 대표인 내가 스케치 같은 것으로 직원들에게 일방적인 지시를 내리다 보면, 필연적으로 건축에서 ‘형태의 자유’가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 『약한 건축』에서 일본의 근대건축사 속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했던 세 유형의 건축가에 대해 설명했다. 무라노 도고, 단게 겐조, 안도 다다오다. 단게는 국가 주도 건축가로서 국가 기반 시설과 인프라를 공급한 세대를 대표하고, 안도는 건축가의 작업 영역을 공공 건축에서 민간 건축까지 확장시켰다. 무라노는 그들과 뚜렷이 다른 태도와 접근을 지닌 인물로, 그를 하나의 유형으로 분류하거나 규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당신은 어느 유형의 건축가가 되고 싶었나?
구마: 무라노의 접근 방식을 가장 존경한다. 단게의 태도는 국가와 밀접히 연결된 수직적 구조였고, 오사카 출신의 안도는 민간경제를 기반으로 한 프로젝트가 많았다. 반면, 무라노는 큰 건물과 작은 집을 모두 설계한 매우 유연한 건축가다. 그런 점에서 무라노 도고와 같은 건축가가 되고 싶었다. 디자인적으로도 무라노의 부드러움과 유기적인 형태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점은, 일본의 전통 건축과 모더니즘 건축을 서로 다른 영역으로 취급하지 않고 동일한 영역으로 바라본 것이다. 전후 일본 건축계는 요시다 이소야로 대표되는 전통파와, 단게 겐조로 대표되는 모더니즘파가 확연히 나뉘어 대립하고 있는데, 무라노는 그러한 대립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 『약한 건축』에서 건축의 역할을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한 바 있다. 하나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는 도구로서의 건축이고, 다른 하나는 시장 수요에 의해 소비되는 상품으로서의 건축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능성 외부에 존재하는, 제3의 다른 대안적 건축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구마: 그렇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관계와 팀워크다. 우리는 가능한 한 공동체와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최대한 프로젝트에 참여시키려고 한다. 하라와 방문했던 아프리카의 마을들에서도, 공동체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장인과 목수들과 함께 일했다. 우리는 그런 팀을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라면 자연스럽게 공동체 속에서 자생하는 건축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네즈 미술관(2009)
도쿄 중심부에 위치한 이 미술관은 정원과 건축, 예술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됐다. 구마는 일본 전통 건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거대한 지붕과 넓은 유리 개구부를 통해 내부 공간을 외부의 녹지 정원과 적극적으로 통합했다. 또한 대나무 숲길로 이어지는 진입로를 통해 도시의 번잡함과 단절된, 고요한 예술 공간을 조성했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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