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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기 개인전

최나욱 기자
자료제공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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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기 개인전> 

국제갤러리 

Jan. 29, 2019 - Mar. 3, 2019 

 

민정기는 줄곧 ‘민중미술’ 작가로 분류되어왔다. 그는 1980년대 민중미술을 주도한 ‘현실과 발언’의 창립회원으로서 ‘촛불전시’로 불리는 <창립전>과 <도시와 시각>전 등 다양한 주제 전시에 참여했고, 당시 활동뿐 아니라 이후 1994년 <민중미술 15년>전, 2016년 <리얼리즘의 복권>전 같은 민중미술을 주제로 한 기획전시에도 참여했다. 비록 다른 민중미술 작가들처럼 강한 민족주의적 색채나 운동권적 성향을 드러낸 건 아니었지만, 일련의 이력은 민정기를 민중미술 작가로 호칭하기에 합리적인 근거가 된다. 그가 미학적 엄숙주의에 반발하여 창안한 이른바 ‘이발소 그림’은 오래도록 그를 민중미술과 연계시켜왔다.

그러나 아직 연구가 충분하게 이뤄지지 않은 ‘민중미술’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작가의 모든 작업을 정의하는 것은 다소 섣부르다. 민중미술 내에서도 각 작가들의 작업 방향에는 차이가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민중미술을 고수하는 작가 한편으로 변화를 꾀하는 이들 또한 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정치적 주제보다 민중을 대상으로 한 미학적 주제를 통해 민중미술에 참여했던 민정기는 후자에 속하는 작가다. 그의 작업이 민중미술과 양립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민중미술은 단지 시대적으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작가와 작품에 따라 개별적으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국제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민정기의 개인전은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어느덧 한국 화단의 원로가 된 민정기는 구작 21점 이외에도 최근 작업한 신작 13점을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민중미술이라고 규정 짓기보다는 폭넓게 봐줬으면 한다”고 주문한다. 국제갤러리 두 관을 모두 사용하는 이번 전시는 그동안 민정기를 수식하던 일련의 논의를 갱신하는 자리로 보인다.

과거와 공통된 건 그가 여전히 풍경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민중의 삶을 담은 풍경을 그려 민중미술로 분류되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 그가 그리는 소재는 도시 풍경뿐 아니라 자연환경, 소설을 바탕으로 한 풍경 등 종류가 다양하다. 그가 과거 민중의 삶에 밀착해 풍경을 그리던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듯 “풍경이 ‘내적 인간’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라면 오늘날 민정기는 어떤 내면을 가지고 그러한 풍경을 그리는 걸까? 전시에서 선보이는 수많은 풍경화와 그것을 다루는 다양한 방식은 작가의 고민을 되묻게 한다.

가장 돋보이는 특징은 그의 풍경화가 고지도의 형식을 참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시를 여는 작품인 ‘묵안리 장수대’에는 단지 소재가 되는 집성촌뿐 아니라 주변의 산세와 물세, 그리고 ‘장수대’라는 이름과 ‘묵암동천’ 같은 바위에 적힌 시구까지 옮겨 적혀 있다. 통상적으로 지도는 과학적 측량에 따른 정확한 정보를 중시하는데, 개인의 감상을 그리는 풍경화에 이러한 지도의 형식이 활용된다는 점은 사뭇 역설적이다. 

 

민정기, ‘묵안리 장수대’, 캔버스에 유채, 211.5×245cm, 2007

 

여기에 대한 설명은 몇 해 전부터 민정기가 도시학자 최종현과 함께 한 답사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일명 ‘인문지리 기행’으로 불린 이 답사는 단지 장소에 한 번 보고 오는 데 그치지 않고, 장소에 대한 철저한 사전 조사와 사후 자료 정리를 반복하는 공부와 다름없다. 여기에 영향받은 민정기가 포착하는 풍경이 눈으로 보이는 장면에 그치지 않고, 답사와 조사를 통해 알게 된 정보를 담아낼 거라는 사실은 자연스런 추측이다. 2016년 금호미술관 전시에서 이러한 새로운 풍경화를 선보일 당시 미술평론가 최민 역시 “보는 것과 아는 것, 즉 지적 정보의 차원이 한데 결합되어 나타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가 주로 차용하는 조선의 고지도는 여느 지도와 달리 회화성을 지니고 있는 양식이기도 하다. 당시 지도를 제작한 화원이 “지도와 회화의 구분이 애매해지는 것을 경계​”▼1​할 정도로 조선의 고지도는 회화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지도와 회화를 막연히 과학적 정보 전달과 개인적 심리 묘사라고 이분화할 것이 아니라, 단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 정도로 구분해보는 편이 적절한 이유다. 민정기의 풍경화는 고지도를 참조함으로써 당장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역사와 기타 맥락을 보여주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다시점 구도’는 개체를 여러 방식으로 바라보기 위한 형식적 특징이다. 마을 전체를 높은 곳에서 내려본 ‘수입리(양평)’처럼 지도의 양식을 따르는 작품은 물론, 언뜻 원근법에 따라 가까운 풍경을 묘사한 것 같은 ‘백세청풍2’ 역시 대상마다 다른 시점을 적용한다. 전통적인 동양화가 그렇듯, 대상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시점을 찾아 다양한 구도를 한 화면 내에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단지 본 것을 그린 게 아니라 몸소 걷고 답사한 것을 그렸다는 사실의 방증이기도 하다. 민정기의 풍경화는 ‘창문으로서 캔버스’라기보다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 그리는 ‘지도로서의 캔버스’라고 할 수 있다. 

풍경화로서 참조 삼은 고지도와 차이도 분명하다. 답사 다닌 흔적을 드러내고 다양한 시점을 사용한다는 방식은 동일하지만, 여기에서 빚어지는 ‘시간성’을 다루는 태도는 대조되기 때문이다. 여러 장소를 옮겨 다녀 그린 다시점 구도는 필연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전제하는데, 지도가 ‘현재의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시간성을 소거하는 것과 달리 민정기의 풍경화는 시간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오래 전의 답사 혹은 지난 역사 속에서 찾은 소재를 풍경에 삽입하는 것이다.

 

민정기, ‘청풍계 1’, 캔버스에 유채, 130×162cm, 2019

 

‘천변풍경’ 연작은 시간성을 화면에 집어넣고자 하는 민정기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박태원이 지은 동명의 소설을 회화로 다룸으로써 ‘이야기’라는 시간에 기반하는 장르를 화면 내에 풀어내는 것이다. 책이 페이지 순서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보여줬다면, 민정기는 다양한 시점과 구성을 통해 여러 시간을 화면 내에 종합한다.

화면 내에 여러 시점, 시간대를 사용하는 특징은 ‘청풍계1’, ‘청풍계2’에서 집약된다. 이름에서 드러나다시피 이 작품은 인왕산 자락을 그린 연작인데, 이 둘을 매개하는 건 일제강점기 친일파 윤덕영이 지은 600평 규모의 프랑스식 건물이다. 사실 이 건물은 1970년대 철거되었지만, 그럼에도 현재를 그린 풍경화에 이 건물을 삽입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 화면 내에서 다른 시간대가 교차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나아가 같은 풍경을 다시 그린 연작은 이 사실을 한층 더 강조한다. 다세대주택이 프랑스식 건물을 둘러싼 풍경을 그린 ‘청풍계1’과 프랑스식 건물 옆에 청와대가 보이고 위로 다른 산맥이 지나가는 ‘청풍계2’를 통해 같은 풍경이 어떻게 다르게 보일 수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다양한 시간과 시점, 소재를 사용하는 풍경을 통해 민정기는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보는 관점과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민정기에게 풍경이란 감상적으로 포착한 장면이기보다, 지리적인 맥락을 치밀하게 살피는 학습물이자 장소의 연원을 살피는 매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라지고 변화된 것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실제 지형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는 심리적 인지도로서의 풍경을 목표한다. 도시 풍경은 금세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그러한 주제 의식을 통해 재현하는 풍경화는 다층적인 의미를 가져다줄 수 있어서다. 

 

전통건축 연구자 김봉렬은 건축이 사라지고 터만 남은 역사 건축물을 연구하면서 ‘폐허가 주는 상상력’을 제안한 바 있다▼2. 물리적으로 보이는 것은 없지만 그것의 터를 통해 건축의 본질을 상상해 볼 수 있다는 의미다. 민정기의 풍경화 역시 그러한 상상력을 토대로 도시 풍경을 살피는 것이지 않을까? 그가 그리는 도시야말로 매번 많은 것이 생겨나는 동시에 그만큼 많은 것이 사라지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현재만을 바라보지만, 민정기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풍경의 총체적인 맥락을 살핀다. 한때 주목받지 못했던 민중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림에 담던 그는, 오늘날에 이르러 ‘현재’ 이외에 주목하지 않는 또 다른 시대와 관점을 조명하고 있다​.

 

1. 김성희, ‘조선후기 회화식 지도와 회화’, 「미술사와 문화유산 5」, 명지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 2016

2. 김봉렬,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돌베개,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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