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자리 전쟁
이곳은 자리싸움의 전쟁터다. 안동별궁의 흔적, 학교 건물, 담장과 마당, 새 집과 입구, 은행나무 그리고 공예와 공예품들의 자리까지. 한 치의 양보도 없다. 학교를 에워싸던 담과 교문은 무장해제되었고, 학교라는 ‘시설’은 박물관으로, 건물은 새로운 쓰임을 받아내며 고쳐졌다. 왕실에서 학생으로 이제 시민들의 장소가 되었다. 모두를 위한 자리로 바뀌었다. 자리가 달라지면 바라보는 지점도 달라진다. 모두의 서울공예박물관은 ‘공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고자’ 만들었고, ‘지하의 역사 유적 보호를 위해’ 주차시설을 만들지 않았다는 안내를 한다. 유적 자리의 한계가 선명하고, 다섯 동 학교시설을 활용해야 하는 이곳에서 건축은 무엇을 했을까? 박물관이라는 쓰임의 결정을 넘어선 건축의 역할은 무엇일까? 공예를 만나러 이곳에 온 이들, 열린 장소를 누리러 오는 모두의 자리는 어떻게 배려되었을까? 550년 만에 열린 땅에 궁금증을 품고 택시에서 내렸다.

©Park Youngchae
건널목에 서자 시간의 혼재가 펼쳐진다. 송현동 옛 주한미군 숙소 부지, 돌담, 상가, 학교, 안국빌딩, 박물관 건물 그리고 잔디밭. 건널목을 마주한 서울공예박물관 본관은 햇살을 뿜으며 오라는 손짓을 한다. 이제 사방이 열려 어디로든 그 자리에 닿을 수 있다. 모든 곳을 열어둔 것이 환대인지 아리송하다. 윤보선길과 감고당길이 이어진 통로에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락거린다. 원래 그랬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아서 좋다. 건축도 아무렇지 않으려는 듯 옅은색 외장재를 택했다. 룩소르 베이지(Luxor beige marble). 돌은 이집트 사막에서 먼 길을 돌아 안동별궁이 묻힌 풍문여고의 정면에 붙었다. 돌출된 벽과 215mm를 들여 만든 창이 1:1 리듬을 반복한다. 돌은 딱 한 장으로 그 자리를 고집한다. 틈에 자리 잡은 조명은 어둠 속에서 집 앞으로 다가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덕분에 본관의 정면은 사람이 주인공이 되고, SNS엔 이곳에서 찍은 인증사진이 바글거린다. 정면 앞에 늘어선 나무와 굵은 모래가 깔린 자리는 안동별궁의 정화당과 경연당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흔적을 기억하는 자리. 입구로 향하는 포장길보다 비워진 그 자리의 느낌이 상쾌하다. 사각사각 그곳을 따라 걷는다. 몇 개월 사이 입구가 바뀌었다. 건물이 여러 동이라 드나들 자리가 많이 필요하다. 많아서 좋고 많아서 혼돈스럽다. 입구들은 여전히 자리다툼 중이다. 그런데 어디에 앉아 이 찬란한 햇살을 쬐고, 어느 그늘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을까? 세금으로 땅을 사고 유물을 구입하고 집을 고쳤는데 조금 무심한 건 아닐까? 매혹적인 공예품이 가득한 곳이니 꼭 안으로 들어오라는 신호일까? 모두가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곳은 바깥이다. 무료로 언제나. 그러기 위해 담을 열고 땅을 비운 게 아닌가? 집 안쪽보다 은행나무가 궁금했다. 본관을 돌자 내 그림자에 겹친 17단 주름위에 그분이 있다. 우와. 안녕하세요! 어르신. 은행나무는 황홀하다. 완만한 경사의 잔디 주름은 나무의 기운을 사방으로 펼치고, 본관의 뒷면은 검은색 벽돌로 담백하게 정리되었고, 교육동의 붉은 테라코타 수평 띠는 나무의 위용을 돋보이게 한다. 멀리 사고석 담장의 에워쌈이 아늑함을 돕는다. 본관을 뚫어 바람길을 열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그렇게 오소록한 자리라서 4백 년을 버텼는지도 모른다. 뚫고 뚫으려는 의지와 잇고 이으려는 쓰임이 만나 멋진 풍경을 만들었다. 2m, 시선보다 살짝 높은 은행나무의 자리에 올라 앉자 담장 너머 송현동 빈 땅이 보인다. 공예를 보러 왔다는 사실을 잊고 오래 그 자리에 머물렀다. 기본적으로 집을 고치는 일은 다시 자리를 잡는 일이다. 집과 땅과 사물의 자리를 다시 매김하는 것이다. 서울공예박물관은 숨어 있던 은행나무의 자리지킴을 핵심으로 다른 자리들을 잡았다. 나무를 피해 증축되는 집을 앉혔고 바라보는 시선을 열었고 닿는 길을 편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건물 뒤편의 이곳을 찾아 안부를 묻고 사진을 찍어대며 쉰다. 그리고 공예를 즐긴다. 이곳은 건축의 힘을 빼고 터의 순리를 따르면 해법이 생기는 곳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오래된 모습을 바꾸려는 욕망을 떨치고, 있던 가치를 지켜야 하는 번거로움이 지독하다. 타협의 경계를 찾아야 하니 어렵다.


‘모두의 공예, 모두의 박물관’이 되려면 모든 시간에 모두에게 열린 마당과 길과 접점이 풍성해야 한다. 그 자리 전쟁이 하루라도 빨리 시작되면 좋겠다. 새벽에 다시 갔다. 푸른빛이 도시를 채우는 시간, 이곳을 지나는 등굣길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싱싱하다. 출근길 차 소리의 번잡함에도 그분의 아우라는 강건하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지난 어느 날 시작된 씨앗일 것이다. 4백 살 은행나무 어른의 “나… 여기 있어”라는 소리. 건축가는 그걸 놓치지 않고 들었을 것이다. 서울공예박물관이 되고 맞은 여름과 늦가을 그리고 겨울, 이 집의 주인공은 ‘공예’지만 장소의 주인공은 여전히 은행나무다. 송현동 빈 땅과 이어질 꿈도 이제 머지않은 미래가 되었다. 서울공예박물관은 서울 도심을 누리는 새로운 자리가 되었다. 봄날 도시락을 싸들고 교육동 옥상의 알록달록한 도자기의자에서 낮잠을 청해야겠다. 고치는 집에서 설계, 전시, 감리가 한 몸이 되지 못하는 공공의 발주 시스템은 혹독하다. 이곳에도 그 생채기가 보인다. 기존 건물은 건축에게 새로운 땅과 같은 존재다. 공사는 곧 새로운 설계의 시작인데 건축가의 개입은 어렵다. 시민들을 위해 ‘최적’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라면 공사의 변수에 대응하는 일은 임무의 연장이자 필수다. ‘좋은 공공건축’을 만들기 위해 비용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쓰임과 질을 높이기 위한 최적을 찾아야 한다.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누리는 자리인데 당연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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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m
28.25%
8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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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박김